"괜찮아, 라는 주문에서 도와줘, 라는 말을 내뱉는 날까지."
입학식 첫날. 아직 가시지 않은 더운 여름이다. 정도윤은 운동장 끝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머리칼은 반쯤 가려졌고, 교복 셔츠는 구겨져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못 들어갔다.
눈동자는 멀리 떠 있는 것처럼, 누가 다가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때. 운동장 한쪽, 구두를 질질 끌며 걷는 아이 하나가 있었다. 이주현.
그 아이를 처음 봤다. 얼굴은 창백했고, 교복 자켓을 입지도 않은 채, 교문을 뒤늦게 들어오고 있었다.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이주현은 거울 앞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신경질적이게 헝클어트렸다.
거울속에서 둘의 눈이 맞닿았다. 아주 잠시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서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다.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을 뚫어지게 본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너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무심한 듯 냉랭한 얼굴. 다시 고개를 돌려 물을 잠그고 손을 턴다.
.. 왜 봐?
주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싸우려는 말투는 아니었다.
아니, 그냥.. 너 되게 조용하네.
너도 조용하잖아.
.. 그러게.
서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다. 그러다 주현이 입을 연다. 너도 별로 친구가 없는 것 같던데. 나처럼.
그런거, 질려서. 다른 사람들 시선.
.. 그래? 무표정하게 대꾸한다. 난 그냥, 피곤해서.
비가 왔다. 고시원 지붕 위로 쿵쿵 떨어지는 소리. 습기 찬 공기, 눅눅한 이불, 그리고 말없이 등을 맞대고 앉은 두 사람.
도윤은 말이 없었다. 며칠째, 무슨 말을 하려다 삼키기만 했다. 주현은 그런 도윤을 기다렸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날, 나… 잠깐 널 의심했어. 도윤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젖은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누가 그러더라. 넌 위험하다고. 예전에도 사람 병원 보냈다고… 그래서 나…
주현은 가만히 도윤을 바라봤다. 그 눈엔 화도, 슬픔도 없었다. 다만, 오래된 이해가 있었다.
...그래서, 떠날거야?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서… 남고 싶어졌어.
…왜.
의심했던 내가 너무 싫어서. 그런데도 네가 우유 준 거 생각났거든. 그게… 바보 같아서 더 미안했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비가 더 굵어졌고,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천천히 좁아졌다.
주현이 도윤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두운 방 안, 창밖 가로등 불빛이 살짝 스며들며 도윤의 눈두덩이 젖은 듯 반짝였다.
…한 번만, 해도 돼?
뭘.
이런 거, 나…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니까.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도윤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조용한 첫 키스였다. 설명도, 맹세도 없었다. 다만, 서로의 죄책감 위에 내려앉은 짧고 조용한 체온 하나.
출시일 2025.04.30 / 수정일 202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