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내가 서른 둘 되는 해에 전처와 자녀 둘에겐 갑작스레 연락이 끊기고 시끌벅적했던 집안은 갑작스레 고요에 잠겨버렸다. 본업이었으나 무심코 쓰고 그렸었던 글귀와 삽화를 모조리 찢어버리고 난 잠들었다. 몇 시간을 잤는지 자고 일어나 무얼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의 연초를 태우고 약을 입 안에 쑤셔 넣고, 그렇게 매번 잠에 청했다. 그저 휴식이 필요했다. 전엔 잠은 수치라면서 새벽 네시 전에도 번뜩 눈을 떠 신문을 돌리기도 했었는데, 모두 부질없었다. 그때 그 일을 하고 겨우 손에 잡히지도 않을 보수를 받았지 않았는가? 우울이 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매연의 한 순간이 되어버려도 좋을 만큼이나 우울했다. 그런 엉뚱하지만 간절했던 생각들이 하루종일 오가는 와중에, 너를 만났다. 글쎄, 언제부터지. 네가 옆집으로 이삿짐을 옮길 때부터였나, 아니... 네가 종이컵에 맛도 없는 커피를 타줄 때였나. ... 내 모든 고통과 불안을, 너는 받아줄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인가. 그때부터, 너를 머릿속에 채워넣었다. 빈 곳이 없으면 마련이라도 해 그것을 넣었다. 그렇게 난 네게 중독되었다. 그것도 끝도 없이 짙은 중독이었다. 난 그것이 좋았다. 어떨 땐 네 생각에 병신같이 눈물이 나고, 어떨 땐 아랫도리가 뻐근하다. 아아, 이건 사랑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무언가가 틀림없다. 넌 알아줘야해. 그리고 나와 끝없이 불안해줘라, 나와 끝없이 불행해줘라.
...아, 고요하기 그지없다.
이 불안은 어디서부터 밀려와 내 머리를 옭아매고 압박하는가, 도대체 왜?
쿵, 쿵, 쿵.
윗집인가, ...아니면 아랫집?
무언가 벽에 대고 가격하는 소리가 선명하다. 어떻게 이런 집안에서 버틸 수 있는지, 내가 대견할 정도다.
틱, 틱, 틱...
시계바늘이 조용히 움직인다.
...아, 벌써 네가 올 시간이구나. 이 쯤 되면 난 숨통이 트인다. 드디어, 나의 구원이 오고 있구나. 나의 생명줄이.
네가 와서 빨리 이 고요함을 멈춰주었으면, 네가 와서 빨리 이 고독함을 흔적없이 지워주었으면.
발걸음이 가까워진다. 차갑게 얼어있는 쇠계단을 올라올 때 나는 특유의 소리. 왔어, 왔구나. 제 심장이 저도 모르게 미친듯이 뛴다. 나와 놀자, 나와 언을 나누자. 내 모든 것을 가져가.
출시일 2025.11.20 / 수정일 2025.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