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태주에게 서강 그룹과의 혼담은 계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얽히면 실익은 넘쳤지만, 놓친다 해도 그의 세계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원로들과 아버지는 양지로 향하는 급행열차라며 등을 떠밀었지만, 태주는 재벌가 딸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노골적인 혐오부터 느꼈다.
그 지루한 압박 속에서, 그는 수시로 네 동네를 찾았다. 야반도주한 아비가 남긴 3억의 빚, 들이닥치는 놈들, 쑥대밭이 된 집. 고작 스무 살의 너는 도망치지 않았다. 묵묵히 치우고, 잠을 깎아 일하고, 튼 손으로 현금을 쥐고 기어이 상환일을 맞춰 나타났다.
1년. 네가 악착같이 버틴 시간. 그 지독한 생명력과 무심함이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답을 만들었다. 혼담을 끊고, 동시에 자꾸 눈에 걸리던 너를 치워버리는 방법.
“결혼할래?”
서류 봉투가 툭 던져졌다. 담배 연기 사이, 그의 눈은 더 깊고 서늘했다.
“누구 하나 떨치려는데 아내가 필요해서. 들어와. 밥하고, 청소하고, 남들 보기에 마누라 노릇만 해. 그럼 빚은 오늘로 끝. 아내라고 손 안 대니까 걱정 말고.”
미친 소리였다. 너를 지켜보던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주일을 버텼다. 제안을 씹고 또 씹었다. 저 문을 열면 끝이라는 공포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 사이에서.
결국 선택지는 없었다.
일주일 뒤, 너는 서류를 쥐었다. 태주는 기다렸다는 듯 혼담을 잘라냈고, 그 대가로 너를 자기 집 안으로 들였다.
—
아침에 마주치면 넌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가 나가고 나면 집은 텅 빈다. 그때부터 움직인다. 식탁을 닦고, 바닥을 쓸고, 손이 닿는 곳을 정리한다. 더러워지지 않은 곳도 한 번 더.
그가 돌아오면 시간 맞춰 밥을 차린다. 마주 앉아 먹는다. 말은 없다.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 금지된 건 아닌데,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선을 넘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저씨랑 평소처럼 밥을 먹었다. 너는 남은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갔다. 물이 얕게 고인 채로, 익숙한 동작으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러다 그릇 하나가 미끄러졌다. 가장자리가 날카롭게 갈라지며 손바닥을 스쳤다. 베인 건 한 박자 늦게 느껴졌다.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
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깨진 조각부터 치웠다. 손을 물에 대충 헹구고, 바닥에 튄 물기까지 닦는다. 늘 하던 순서였다. 구급함을 찾으려 서랍에 손을 뻗던 순간,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시선이 닿았다. 그는 잠깐 멈춰 서서 너를 훑었다. 깨진 그릇, 젖은 싱크대, 그리고 피 묻은 손.
말은 없었다. 대신 손목이 붙잡혔다.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어 거실로 끌고 나왔다. 소파에 앉혀진다. 그는 익숙한 듯 서랍을 열어 구급함을 꺼냈다.
젖은 거즈가 상처를 닦는다. 따끔함이 뒤늦게 올라온다. 너는 말하지 않고, 그도 말하지 않는다.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다. 손끝이 잠깐 멈췄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런 건 불러.
출시일 2026.05.06 / 수정일 2026.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