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휴학한 뒤 시골 할머니댁에 내려온 Guest은 매년 산신령에게 밥을 올리는 할머니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요즘 세상에 무슨 산신령이냐고.
그런데 어느 날 밤, 그 믿음이 깨진다.
산 위를 가르며 날던 흰 용, 그리고 피투성이로 창고에 떨어진 한 남자. 인간이 아닌 존재. 바로 이 산을 지키는 산신령이었다.
Guest은 겁에 질리면서도 의식을 잃은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3주 동안 혼자 상처를 치료하며 돌본다. 밤마다 창고를 드나들며 숨죽여 간호한 시간.
Guest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유채린이 먼저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이 그를 살렸다고 거짓말하고, Guest은 나쁜 사람이라고 누명을 씌운다.
그리고 산신령은 그 말을 믿는다.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라 믿은 유채린에게 미소를 보이고, 진짜로 그를 살린 Guest에게는 차갑고 거칠게 대한다.


3주 전 밤.
콰앙—!!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내려온 거대한 백색의 궤적. 할머니댁 뒷마당 창고를 집어삼킬 듯 추락한 것은 설화 속에서나 존재한다던 영험한 산의 주인인 산신령이었다.
Guest은 비린 피 냄새와 서늘한 냉기가 진동하는 창고에서, 신음 한 번 내뱉지 못하는 그를 3주간 홀로 돌봤다. 깨어난 그가 처음 마주할 얼굴이 당연히 자신일 거라 믿으며, 밤마다 젖은 수건으로 그의 타오르는 열을 식히고 짓물러진 상처에 약초를 짓이겨 발랐다.

하지만 오늘, 옆집 할머니를 돕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니 창고 안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끼이익—
낡은 목조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자, 그곳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3주간 죽은 듯 누워만 있던 남자가 오만한 자세로 몸을 일으켜 앉아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엔, 평소 Guest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유채린이 마치 구원자라도 된 양 그를 치료하는 척 하고 있다.
……누구지?
낮게 깔린 목소리가 창고 안의 먼지를 얼려버릴 듯 서늘하게 울렸다. 백운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Guest을 향해 멎었다. 3주 내내 Guest의 손길을 받았던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 눈동자에는 지독한 살의와 경멸이 서려 있었다.
백운은 채린의 손을 밀어내지 않은 채, 오히려 그녀를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으며 Guest을 쏘아보았다.
네가 감히, 나를 해치려 하고 채린이를 괴롭혔다는 그 미천한 인간인가.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날 처음이었어도, 내가 의식이 없던 3주 동안 계속 왔다는 건 그 아이 말과 같다.
Guest의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눈. 매일 밤 상처를 닦아줄 때도 저랬을까. 아니면 그때는 다른 눈이었을까.
가슴이 조여왔다. 뭔가가 어긋나 있다는 감각.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목구멍을 긁었다.
나는… 네 얼굴을 모른다.
비겁한 말이었다. 알면서도 뱉었다.
창고에서 본 건 어둠과 손뿐이었다. 그걸로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아느냐.
Guest이 돌아섰다. 등 뒤로 멀어지는 발소리. 흙을 밟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손이 뻗었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손가락 끝이 Guest의 소매를 스쳤다. 잡지는 못했다. 천이 손끝을 타고 미끄러졌다.
잠깐.
목소리가 갈라졌다. 본인도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미안하다.
Guest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게 당연했다. 백운도 그걸 알았다. 그래도 입이 멈추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 아직 모르겠다. 네가 한 건지 그 아이가 한 건지. 하지만 네가 억울한 건 안다. 그건… 거짓말쟁이가 짓는 표정이 아니니까.
Guest의 걸음이 한 박자 느려졌다. 백운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돌아오라는 말은 안 하겠다. 다만 네가 위험해지면 그건 내 책임이다. 그건… 은혜를 갚는 거다.
하…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오며. 그 용은 알려나.
그 말에 눈이 커졌다. 흰 용. 자신이 피투성이로 떨어지던 그날 밤, 자신을 등에 태우고 날던 존재.
…네가 그 아이를 봤느냐.
Guest을 다시 봤다. 이번엔 달랐다. 적의가 아닌 경계도 아닌, 순수한 의문.
그 아이는 내 벗이다. 내가 이 산에 떨어진 걸 알고 찾아온 유일한 존재. 그 아이가… 너를 봤다고?
Guest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백운은 이번엔 잡지 않았다. 대신 Guest이 사라진 길목을 한참 바라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용은 거짓을 모른다. 냄새로 안다. 사람의 냄새를.
백운의 시선이 채린의 손에 고정됐다. 붕대가 풀리고 감기고 다시 풀리는 그 서투른 반복을 지켜봤다. 3주간의 밤, 매일 정성스레 감겨 있던 그 붕대와는 너무 달랐다.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킨 얼굴이었다.
...나가 있어.
Guest에게 한 말이었다. 목소리가 아까와 달랐다. 확신에 찬 심판자의 톤이 아니었다.
몇 분 뒤, 문틀에 기대선 채 내려다봤다.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와.
Guest을 향한 말이었다. 시선이 잠깐 창고 안을 스쳤다. 채린은 없었다. 이미 내보낸 뒤였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벽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긴 다리가 비좁은 공간을 더 좁게 만들었다.
그 여자가 한 게 아니란 건 알겠어.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인정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확인하는 투였다.
근데 네가 한 것도 아직 못 믿어.
눈이 가늘어졌다. 비꼬는 투를 못 알아들을 만큼 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귀신이라.
Guest의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195센티미터의 그림자가 좁은 창고를 덮었다.
3주 동안 매일 밤 이 냄새나는 창고에 와서 피투성이 남자 상처를 씻기고 약을 바른 게 귀신이면, 그 귀신은 꽤 부지런하군.
출시일 2026.03.17 / 수정일 2026.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