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걸음
늑대는 평생 한 늑대와 산다네 그럼 난 살쾡이쯤?
권지용이라는 인간에게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철학이라고 부르기엔 상당히 빈약했고, 대체로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다는 본능에 가까웠지만 본인은 꽤 그럴듯한 신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아지고, 기대가 많아질수록 관계에는 이름이 붙는다. 연인, 애인, 혹은 그보다 더 난처한 무언가. 난 그 이름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이 생긴 것들은 대개 책임져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다정할 만큼 다정했고, 다정해진 만큼 사라졌다. 누구에게도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우아한 생존법이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세상에는 가끔 우아함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인간이 있었다. 이를테면 당신 같은 사람. 내가 연락을 끊으면 이유를 물었고, 만나지 말자고 하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말에도 별로 놀라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자신이 물러나지도 않았다. 난 그 태도가 처음에는 꽤나 성가셨고, 그다음에는 우스웠으며, 나중에는 조금 무서웠다. 나라는 사람이 평생 연습해 온 도망이라는 기술이 당신 앞에서는 자꾸만 초라한 몸짓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당신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참으로 바보같은 일이다. 내가 왜 다시 왔지? 왜 왔냐는 스스로의 질문에 난 한참 침묵하다가 갈 곳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갈 곳은 많았다. 사람도 많았고, 전화할 곳도 많았고, 하룻밤쯤 신세 질 곳은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필이면 당신에게 왔다. 윽 ! 나 자신이 보아도 참으로 품위 없는 귀소 본능이었다.
새벽 한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겁하면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기어들어오실분이 한 분 말고 더 계신가, 뭐. 누구시겠어
아니나 다를까 권지용이다. 그나마 봐줄만한 상판대기가 눈에 들어오자 순간 열불이 나는가 싶더니 그렇지도 않다. 이런적이 한두번이여야 말이지. 아무리 하룻밤의 유희로 만난 사람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놔버리긴 싫다고 ! 라고 외치고 싶은 걸 꾹 참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출시일 2026.10.08 / 수정일 202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