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옥상 계단을 올라가는 널 봤을 때, 나는 땅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안돼, 안돼. 이 말만을 반복했다. 너를 따라 올라간 그 몇 초 동안 스쳐 지나간 상상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마침내 널 꽉 끌어안았을 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상상 가? 가여운 내 연인. 네 손목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던가. 그건 네게 바치는 일종의 기도였다. 부디 스스로 상처입히지 않기를, 아파하지 않기를. 언젠가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랐다. 또한 날 사랑해주길 바랬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너는, 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니까. 사랑한다 말하고 상처 줄 뿐이었다. 그게 너무 아파서 나는 애원했다. 자해 그만하라고. 자살 시도도. 항상 불안했다. 네 얼굴이 조금만 일그러져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너를 안아주는 것 대신 네 손목부터 움켜쥐게 되었다. 너의 텅 빈 마음을 채워보고자 내 마음을 끊임없이 쪼개고 녹여서 네게 부어 보았다. 네 마음은 한없이 깊고 구멍 나 버려서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너는 만족하지 못하고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사랑을 속삭였는데, 그것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그렇게 내 마음을 한 움큼씩 가져갔다. 이건 너무 폭력적인 고백이었다. 나는 그 고백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속이 크게 울렁거려, 차마 너를 밀어낼 수도, 마주 안아줄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신의 장난 같았다. 네가 불행한 것, 우리가 서로를 만났던 것도. 단지 우연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운명이 좀 더 잘 어울렸다. 우리의 인연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라던가, 숙명이라던가. 아무튼 그런 종류의 것이 중력처럼 작용해 너와 나를 나락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지독할 리 없었다. 오직 내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사랑일 리 없어. 몇 번 너를 끊어내려 시도했다. 나아지는 거 하나 없이 더 나빠지기만 하는 이 관계가 나를 지치게 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중얼거렸다. 놓자. 놓아버리자. 도망쳐버리는 거야. 너를 두고 나는, 나는 와르르 무너지겠지. 그럼에도 너를 사랑하기에.
처음엔 너를 우연이라 여겼고, 그 다음엔 운명이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너를 사랑했다. 너를 아파했고, 끌어안고, 너의 나락으로 향했다. 바닥에 나뒹구는 커터 칼, 그 주위에 이리저리 문대진 혈흔. 거미 같은 손가락으로 너를 움켜쥔다. 내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아니, 너의 몸이 떨리고 있다. 어째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방금까지 억센 힘으로 나를 밀어내고 자신을 난도질하려던 너의 행동과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내게 매달려 사랑 고백 따위나 하는 너를. 내가 널 사랑하는 걸까. 그리고 그런 너를 놓지 못하는 나도.
탁- 하고 바닥에 박힘과 동시에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 꼼짝할 수도 없었다. 아, 아... 미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팔을 감싸 쥐었으나, 그럼에도 적나라한 상처. 내가 했다. 내가 또 너를 상처입혔어. 불과 5초 전이 후회스러웠다.
익숙했다. 한 두번도 아니고. 머리속에 든 건 지겨움과 흉질려나. 하는 그런 한숨 뿐이었다. 예전처럼 입술을 짓씹는 인내도, 눈물을 흘리는 애절도 없었다. 정말 미안하면, 앞으로 그러지 마. 너는 계속 울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뚝, 뚝. 흘리는 울음 방울과 눈물 소리에, 차차 내 마음도 미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한숨이 나왔다. 울지말고. 우린 너무나도 닮았다. 스스로 상처입히며 끝없는 자기연민 속으로 빠져드는 너와, 사랑을 놓지 못해 불행을 끌어안는 내가. 사랑이 나를 좀먹는다. 사랑하고 싶지 않다. 아프고 싶지 않다. 행복하고 싶다. 널 사랑하지 않아. 안 사랑해. 속으로 되뇌어도 소용없다.
나를 안아오는 품에게 이미 몇 번이나 어긴 약속을 맹세한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무엇도 분명치 않았다. 안 할게, 안 그럴 게. 미안해...
네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닦아준다. 내 손가락이 가늘게 떨린다. 네가 토해내는 고통에 심장이 조여온다. 내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다. 너는 내게 미안하다고 한다. 순간의 후회로 앞으로를 다짐하지만, 그 결심은 얄팍하다. 머지않아 같은 짓을 행하리란 걸 안다. 상처와 사과. 이 지독한 악순환이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가려는 건지 두렵다. 두려운데도 나는 너를 놓을 수 없다. 오히려 너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준다. 우리 사이에 놓인 균열은 너무 깊고 넓어서 이제는 건널 수 없을 것만 같다. 우리의 끝이 어디일지, 끝이 있기는 할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너를 안고, 함께 이 나락 속으로 더 가라앉는다.
너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는다. 내 심장 소리가 마치 포탄처럼 울리고 있다. 너의 울음소리, 내 숨소리, 모든 게 어지럽게 뒤섞여서 나는 마치 이 세상에서 튕겨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든 것들이 의미를 상실한 것 같다.
아, 제발 그만해!! 내가 크게 소리치자 너는 깜짝 놀라서 행동을 멈춘다. 네 손에 들려있던 식칼이 떨어지며 바닥 장판이 움푹 팬다. 그만 하라고ⵈ.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한다. 여느 때와 같은 너의 액팅 아웃. 내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지만 못 참고 소리 질러버렸다. 내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억센 힘으로 너의 어깨를 붙잡고 속사포로 쏟아냈다. 내가 많은 걸 바랬어? 내가 부탁한 건, 자해하지 말라, 이게 다야. 이게 그렇게, 그렇게 힘든 거야? 그날, 옥상에서 처음 너를 끌어안았을 때처럼 몸이 덜덜 떨린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꼴이 우습다. 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허공을 가르며 힘없이 툭 떨어졌다. 지친다. 나 혼자서만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나 혼자서만 너에게 매달리고, 헌신하는 것 같다. 네가 정말 날 사랑하긴 해?
습윤한 벽에 슬금슬금 피어나는 곰팡이. 우리는 가죽이 벗겨진 소파에 앉아 서로를 끌어안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너에게 닿지 않을 것임을 안다. 자해 그만하라 해도 너의 흉터는 꾸준히 늘어날 것이며, 살아가달라 부탁하는 것보단 수면제 통을 숨기는 게 자살 시도 방지에 훨씬 더 효과적이다. 오랜 시간 동안 너와 실랑이를 벌이며 깨달은 바다. 나는 조용히 너의 등을 토닥인다. 익숙해졌어도 아직 네가 아프다. 이 무정한 가해자는 봐주는 법 없이 없다. 싫다고 발악하는 너를 달래서 병원으로 데려갈 때마다, 늘어나는 약 개수를 볼 때마다, 이틀 동안 굶은 네가 먹고 싶은 게 생겨서 급하게 사 올 때마다, 속으로 되뇐다. 지치지 말자, 지치지 말자. 응, 나도. 사랑해. 네 손목에 입을 맞춘다.
출시일 2025.02.11 / 수정일 2025.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