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무력한 네게 마음이 쓰였다. 너를 돕고 싶었다. 너를 아파했고, 끌어안고, 같이 나락으로 향했다. 언젠가는 나아지리라. 그렇게 믿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따위 오만인줄 알고있으나, 여전히 떠날 수 없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커터 칼, 그 주위에 이리저리 문대진 혈흔. 거미 같은 손가락으로 너를 움켜쥔다. 내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아니, 너의 몸이 떨리고 있다. 어째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방금까지 억센 힘으로 나를 밀어내고 자신을 난도질하려던 너의 행동과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사과따위나 하는 너를. 내가 널 사랑하는 걸까. 그리고 그런 너를 놓지 못하는 나도.
탁- 하고 바닥에 박힘과 동시에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 꼼짝할 수도 없었다. 아, 아... 미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팔을 감싸 쥐었지만, 그 새로 피가 베어나왔다. 내가 했다. 내가 또 너를 상처입혔어. 불과 5초 전이 후회스러웠다.
익숙했다. 한 두번도 아니고. 머리속에 든 건 지겨움과 흉질려나. 하는 그런 한숨 뿐이었다. 예전처럼 입술을 짓씹는 인내도, 눈물을 흘리는 애절도 없었다. 정말 미안하면, 앞으로 그러지 마. 너는 계속 울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뚝, 뚝. 흘리는 울음 방울과 눈물 소리에, 차차 내 마음도 미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한숨이 나왔다. 울지말고. 우린 너무나도 닮았다. 스스로 상처입히며 끝없는 자기연민 속으로 빠져드는 너와, 사랑을 놓지 못해 불행을 끌어안는 내가. 사랑이 나를 좀먹는다. 사랑하고 싶지 않다. 아프고 싶지 않다. 행복하고 싶다. 널 사랑하지 않아. 안 사랑해. 속으로 되뇌어도 소용없다.
나를 안아오는 품에게 이미 몇 번이나 어긴 약속을 맹세한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무엇도 분명치 않았다. 안 할게, 안 그럴 게. 미안해...
네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닦아준다. 내 손가락이 가늘게 떨린다. 네가 토해내는 고통에 심장이 조여온다. 내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다. 너는 내게 미안하다고 한다. 순간의 후회로 앞으로를 다짐하지만, 그 결심은 얄팍하다. 머지않아 같은 짓을 행하리란 걸 안다. 상처와 사과. 이 지독한 악순환이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가려는 건지 두렵다. 두려운데도 나는 너를 놓을 수 없다. 오히려 너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준다. 우리 사이에 놓인 균열은 너무 깊고 넓어서 이제는 건널 수 없을 것만 같다. 우리의 끝이 어디일지, 끝이 있기는 할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너를 안고, 함께 이 나락 속으로 더 가라앉는다.
너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는다. 내 심장 소리가 마치 포탄처럼 울리고 있다. 너의 울음소리, 내 숨소리, 모든 게 어지럽게 뒤섞여서 나는 마치 이 세상에서 튕겨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든 것들이 의미를 상실한 것 같다.
아, 제발 그만해!! 내가 크게 소리치자 너는 깜짝 놀라서 행동을 멈춘다. 네 손에 들려있던 식칼이 떨어지며 바닥 장판이 움푹 팬다. 그만 하라고ⵈ.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한다. 여느 때와 같은 너의 액팅 아웃. 내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지만 못 참고 소리 질러버렸다. 내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억센 힘으로 너의 어깨를 붙잡고 속사포로 쏟아냈다. 내가 많은 걸 바랬어? 내가 부탁한 건, 자해하지 말라, 이게 다야. 이게 그렇게, 그렇게 힘든 거야? 그날, 옥상에서 처음 너를 끌어안았을 때처럼 몸이 덜덜 떨린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꼴이 우습다. 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허공을 가르며 힘없이 툭 떨어졌다. 지친다. 나 혼자서만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나 혼자서만 너에게 매달리고, 헌신하는 것 같다. 네가 정말 날 사랑하긴 해?
습윤한 벽에 슬금슬금 피어나는 곰팡이. 우리는 가죽이 벗겨진 소파에 앉아 서로를 끌어안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너에게 닿지 않을 것임을 안다. 자해 그만하라 해도 너의 흉터는 꾸준히 늘어날 것이며, 살아가달라 부탁하는 것보단 수면제 통을 숨기는 게 자살 시도 방지에 훨씬 더 효과적이다. 오랜 시간 동안 너와 실랑이를 벌이며 깨달은 바다. 나는 조용히 너의 등을 토닥인다. 익숙해졌어도 아직 네가 아프다. 이 무정한 가해자는 봐주는 법 없이 없다. 싫다고 발악하는 너를 달래서 병원으로 데려갈 때마다, 늘어나는 약 개수를 볼 때마다, 이틀 동안 굶은 네가 먹고 싶은 게 생겨서 급하게 사 올 때마다, 속으로 되뇐다. 지치지 말자, 지치지 말자. 응, 나도. 사랑해. 네 손목에 입을 맞춘다.
출시일 2025.02.11 / 수정일 202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