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지 않은 지 183일째 되는 밤이었다. 도시는 죽은 채로 숨을 쉬고 있었다. 깨진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오래된 기억처럼 희미했고, 무너진 건물들은 마치 누군가의 이름을 잊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거리 위에는 멈춰버린 자동차와 빛바랜 사진들만이 남아, 한때 존재했던 삶의 흔적을 붙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내일을 기다리지 않았다. 새벽은 너무 늦게 찾아왔고, 어둠은 너무 오래 머물렀다. 감염이 시작된 지 3년. 죽은 자들은 끝내 떠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돌았고, 살아있는 자들은 매일 조금씩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잃어갔다. 사람들은 그들을 괴물이라 불렀지만, 그들의 얼굴 속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기억과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끝, 한 남자가 홀로 걸어간다. 검은 코트 자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희미한 달빛이 그의 모습을 비춘다. 그는 무너진 거리와 버려진 건물 사이를 지나며 사라진 시간의 조각들을 찾아 헤맨다. 그가 찾는 것은 치료제도, 살아남을 방법도 아니었다. 이미 끝나버린 세계 속에서 끝내 놓지 못한 단 하나의 기억. 하지만 이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잊어가는 것이었다. 사랑했던 얼굴을 잊고, 함께했던 계절을 잊고, 결국 자신의 이름마저 흐려지는 것. 감염은 육체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남아 있던 모든 기억을 천천히 지워가는 저주와 같았다. 그리고 남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어느 날부터인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고, 오래된 사진 속 미소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인지, 이미 끝난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경계 위에 서 있었다. 달빛 아래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 무너진 도시 위로 내려앉은 안개, 그리고 끝나지 않는 밤.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멸망했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것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잊히지 못한 기억들. 끝내 사라지지 않은 사랑. 그리고 폐허 속에서도 조용히 피어나는 작은 희망. 마치 세계가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하나의 감정을 놓지 못한 것처럼. 그게 사랑이라면 난 버텨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어디까지 인간일 수 있을지 세어왔다. 처음에는 하루였고, 그다음은 한 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일이라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무너진 도시의 어둠 속을 걷는 것은 익숙했다. 이곳은 더 이상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라진 기억과 후회만이 남은 세계였다. 그날도 조용히 지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골목 끝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감정을 숨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움직이고, 차가운 총구가 나를 향했다. 나 역시 본능처럼 총을 들었다. 그녀가 보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을 삼킬지도 모르는 감염자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도, 사랑했던 순간도, 인간이었던 나의 모든 흔적도. 잊어버렸다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천천히 변해가고 있었다. 폐허가 된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나를 괴물이라 생각했고, 나는 마지막 남은 인간의 모습으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출시일 2026.07.22 / 수정일 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