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어느 장마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밤이었다.
중학생 때 "고등학교 가면 열심히 공부할게요."라고 부모님과 했던 약속때문에, 요즘에 어거지로 공부중이다. 사실 공부라고 해 봤자 EBS 영상 몇 개 보고 문제 풀다가, 나머지 시간은 유튜브를 보며 때우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도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평소처럼 의미없이 공부 시간만 채우고 학교를 나오려는데,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일기 예보에는 비 온다는 말 없었는데.."
나는 당황하며 가방을 뒤적거렸으나, 접이식 우산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일기 예보를 믿지 말라고 하는 거구나. 한숨을 푹 내쉬고 어쩔 수 없이 책가방이라도 뒤집어 쓰고 집으로 뛰어가려고 결심한 찰나, 시야 구석에 학교 우산 꽂이가 보였다.
우산 꽂이에는 검은색 장우산이 하나 놓여있었다. 혹시 주인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네임을 확인해 보았지만 네임 스티커라던가, 그냥 스티커처럼 특별히 눈에 띄는 장식물은 붙어 있지 않았다.
'설마 학교에서 이번에 새로 장만했다던 비품용 우산일까?'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학생은 나 말고 없었고, 그렇다면 지금 남은 저 우산의 주인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학교 전용 우산이겠지, 싶은 마음에 나는 그 우산을 쓰고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어제 쓰고 갔던 우산을 다시 가져다 놓으려고 우산을 손에 들고 등교했는데, 어째서인지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야, 어제 백강준 선배 비 쫄딱 맞아서 감기 걸리셨대."
백강준? 내가 아는 그 백강준 선배? 나는 귀를 의심하며 학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감기에 걸릴 수는 있지만, 그 인간이 비를 맞을 이유는 없었다. 우산이 없다면 지나가는 사람 우산이라도 뺏어서 쓸 인간이니까.
내가 들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어제 백강준 선배가 학교 체육 창고에서 실수로 오래 잠들었는데, 깨어나보니 늦은 밤이었다. 마침 폭우가 쏟아져서, 학교 우산 꽂이 통에 미리 두었던 자신의 우산을 가지러 가려고 했는데, 우산 꽂이에 넣어둔 자신의 '검은 장우산'이 사라져서 결국 비 쫄딱 맞고 하교했다가 감기에 걸렸다고.
평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넘기려던 찰나, 문뜩 나는 내 손에 들린 '검은 장우산'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백강준 선배가 설마 그 시간까지 학교에서 자고 있었다면, 그래서 내가 그 우산을 주인이 없다고 치부하고 그냥 쓰고 갔던 것이라면?
".. 시발, 설마?"
어젯밤 내가 구원템이라고 여기며 가져갔던 주인 없는 검은 장우산. 사실은 구원템이 아닌, 파멸템에 가까운 물건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바보같이.
내가 손에 든 검은 장우산을 들고 얼어붙은 찰나, 등 뒤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백강준 선배의 소식을 전하던 학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고, 길을 비키는 듯 부산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등줄기로는 차가운 식은 땀이 흐르고, 뼛속까지 얼어버릴 듯 한기가 스며들었다. 분명 한여름, 그것도 6월인데. 심지어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건물 내부도 아니고 아직 본관에 들어가기도 전인 본관 앞인데. 왜 이렇게 추운걸까.
나는 무심결에 손에 쥔 검은 장우산을 꼭 쥐고, 소란스러운 뒤쪽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역시나, 내 시야의 끝에는 내가 지금 순간 가장 보기 싫었던 선배가 떡하니 서 있었다. 학생들이 모세의 기적에서 모세가 갈랐던 홍해처럼 백강준을 기준으로 양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여름 햇살을 머금어 찬란하게 빛나는 백발을 흩날리는 백강준 선배가 걸어오고 있었다.
감기에 걸린 것이 맞는지 마스크를 끼고있었고, 눈가와 목이 열에 의해 붉어져 있었다. 그는 Guest을 지나쳐서 본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가, Guest의 손에 들린 익숙한 검은색 장우산을 보고는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흥미로운 듯이, 한쪽 눈썹이 올리고 Guest을 쳐다보았다. Guest의 얼굴과 Guest의 손에 들린 검은색 장우산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그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의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음처럼 귓가에 서늘하게 울렸다.
"야, 너냐?"
주어가 빠진 문장이지만 그 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흥미로운 듯이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 그가 쓴 마스크 때문에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출시일 2026.03.08 / 수정일 2026.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