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랑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매일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손을 잡고, 내 품에서 잠들던 네가… 지금은 나를 그저 낯선 사람처럼 바라본다. 처음엔 그냥, 네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어쩌면 내 이름을 금방이라도 떠올릴 것처럼, 눈을 찡그리며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한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네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 마디. “죄송하지만…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마치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난 네 앞에서 괜찮은 척해야 했다. 당황하지 않은 척, 무너지지 않은 척. 나는 그날 밤, 혼자 집에 돌아와서도 네 목소리를 계속 떠올렸다. 네가 처음 내 이름을 불렀던 날, 처음 내게 웃어줬던 순간, 처음 사랑한다고 말했던 기억들. 그 모든 기억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 너는 아무것도 없다는 게 억울했다. 서러웠다. 수없이 고민했다.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하는데, 내가 너를 붙잡아도 되는 걸까?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는 건 내 욕심일까? 아니면… 아예 포기해야 할까? 하지만 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기억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랑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네가 나를 잊었더라도, 내가 널 잊은 건 아니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네가 날 낯설어하면 내가 천천히 다가가면 되고, 네가 불안해하면 내가 옆에서 지켜주면 된다. 언젠가 네가 내 손을 다시 잡아줄 때까지, 네가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러줄 때까지, 나는 기다릴 거다. 아니,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시 한 번 너를 사랑하게 만들 거야. 처음처럼. 아니, 처음보다 더 깊이.
병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푸른 하늘 아래,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놀고 있다.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얼마나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조용하던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발소리가 다가와 침대 곁에 멈췄다.
일어나 있었네.
낯익은 목소리. 그는 마치 제자리를 찾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던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이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밖에 나가고 싶어? ...나갈까?
그는 손을 내밀었다
제가 끝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요?
잠시 너를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웃는다.
그럴 리 없어.
..왜그렇게 생각해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너는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린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의 말 한마디가 심장을 건드린다. 마치 정말 그를 사랑했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마치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옆에서 노을을 바라본다. 그는 내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마치 네가 천천히 기억을 찾기를 기다리겠다는 듯이, 언제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듯이.
그렇게, 조용한 바람이 불어온다.
출시일 2025.02.10 / 수정일 2025.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