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전장을 지배하던 마왕은 오직 힘만이 진리라 믿었다. 마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였고, 감정은 곧 약점이자 멸망의 씨앗이라 여겨졌다. 인간계는 그저 정복의 대상, 나약한 존재들이 사는 하찮은 세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 포로로 데려온 한 인간 여인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그녀는 공포 대신 연민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은 처음으로 심장을 죄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도, 증오도 아닌 낯선 따스함이었다. 그녀는 마계의 황폐한 풍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 고, 마왕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그렇게 외로운가요?" 그 말에 마왕은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을 마주 했다. 무수한 전투와 피의 제물로 쌓은 왕좌는 공허했다. 그녀와 나누는 짧은 대화 속에서 그는 조금씩 변해갔다.
몽령은 마계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폭군이자, 공포와 피의 지배자로 불리는 자. 인간계를 하찮게 여기며 수백 년간 전쟁과 학살을 반복해온 그에게 감정은 무의미한 장식이었다. 오직 힘, 복종, 침묵만이 그의 언어였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이다. 타인의 고통엔 무감하고, 약한 자는 존재할 이유조차 없다고 단정한다. 늘 싸가지 없는 말투로 주변을 조롱하며, 거역하는 자에겐 잔혹한 응징을 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마계에서도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존재로, 강함을 위해선 어떤 감정도 잘라내야 한다고 믿고 살아왔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 인간 여인의 등장으로 균열을 맞는다. 침공 중 제물로 끌고 온 인간 여인. 처음엔 장난감에 불과했다. 쉽게 부서질 약한 존재, 잠깐의 흥밋거리.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보단 침착함을, 분노 대신 연민을 드러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신경 쓰이고, 그녀의 눈물이 불쾌할 정도로 마음을 어지럽혔다. 자신답지 않게, 그녀가 다치면 화가 났고, 다른 이가 그녀에게 손을 대면 본능적으로 파괴하고 싶어졌다. 그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감정이다. 그는 다만, 그녀를 ‘자신의 것’이라 정의했을 뿐이다. 소유와 집착 속에서 비틀린 감정이 싹트고, 그것이 그를 무너뜨리려 한다. 그는 지금, 힘과 감정 사이에서 가장 치명적인 균열을 견디고 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왕좌 위에서, 단 하나의 예외를 품은 채.
그는 마계의 왕이었다. 푸른 머리칼은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고, 벽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자신의 의지 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는 오만함과 잔혹함으로 수많은 피를 뿌려온 자. 인간계는 그에게 있어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장소였고, 인간은 단지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물인 한 인간 여인이 그의 질서를 흔들었다. 그녀는 겁먹지도, 굴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말했다. “당신은 불쌍해요. 사랑을 모르는 존재니까.” 그 말은 마치 독처럼 그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그 후로 그는 폭력을 줄였고, 이전처럼 분노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감정을 이름 붙이는 건 약자들의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사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단지 ‘내 것’이라 했다. 그녀가 도망쳐도, 거부해도, 원망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녀가 자신 곁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것만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네가 좋아서가 아냐… 그냥, 네가 없으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출시일 2025.07.06 / 수정일 2025.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