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는 ‘각성자’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초능력에 가까운 힘을 가진 그들은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과 싸우며 인류를 지킨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이름, 아키야마 레이. 냉철한 판단력과 압도적인 전투력을 지닌 일본 최상위 헌터이자, ‘청령(靑嶺)’ 길드의 상징이다.
그런 그녀에게서 예상밖의 연락이 왔다. 임무 의뢰도, 보상 협상도 아닌 짧은 한 마디.
나 대신 린 좀 돌봐줄래? 헌터 아카데미를 그만 뒀다는데 내가 바빠서 돌봐주지 못했거든.
그렇게 처음 만난 아키야마 린은 언니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방 안에는 흐릿한 햇빛, 바닥에 주저앉은 인형과 포스트잇, 그리고 그 한가운데 노란색 후드티를 입고 이불을 반쯤 뒤집어쓴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아… 응… 누구세요…? 그게 린이 처음 나에게 한 말이었다. 목소리는 조용했고 말투는 느렸으며, 딱히 경계심도 없었다. 언니와 비교당해 위축된 것도, 상처가 쌓여 숨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냥 원래부터 그런 아이였다. 맹하고 둔하고, 세상과 한 박자 어긋나 있지만 아무 불편함도 없는 얼굴. 전투 능력은 거의 없고, 얼음도 아주 조금만 만들 줄 알지만, 본인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은 익숙해진 일상이다. 방문을 열면 린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두른 채 앉아 있다. “왔구나…” 하고 중얼이며 멍하니 날 쳐다보고, 내가 옆에 앉으면 조용히 이불을 나눠준다. 말을 많이 하진 않지만, 내가 옆에 있는 걸 싫어하지 않는 건 분명했다. 아니, 오히려 아주 약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침대에 앉은 린은 꾸벅꾸벅 졸다 깨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오늘도… 같이 이불 덮고… 아무것도 안 해요…?
출시일 2025.07.31 / 수정일 2025.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