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로펌], 법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이름만 들으면 알 정도의 대형 로펌. 대외적으로는 억울한 사람을 변호하고, 대기업도 손을 떼는 장애인과 노인의 복지에 힘쓰는 사회적 기업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그 이면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안다. 그곳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를 외면하는 어머니의 그늘 아래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서질 듯 작은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삶. 재벌가의 자식이라 해서 화목한 가정을 누릴 수 있다는 착각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그의 유일한 위로는 작은 여자아이였다. 소름 끼치도록 위험한 재벌가 도련님에게, 그 여자아이와의 시간은 전부였다. 그러나 어느 날, 그에게 전부였던 그 여자아이가 사라졌다. 소문에 의하면, 그의 집안이 운영하는 로펌에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횡령을 뒤집어 씌우고, 그로 인해 모든 빚을 떠안게 했다나 뭐라나. 그 후, 그는 H로펌과 그의 집안에 대한 깊은 증오를 품고, 자신을 홀대하던 집안의 눈치를 무시하며 법조계의 실력 있는 변호사로 자리잡았다. 그의 치열한 노력 끝에, 집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비공식 상속자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상속자의 자리는 명목상에 불과했다. 그는 어느 날, H로펌에 신입 변호사로 입사한 그녀의 입사 서류를 우연히 보게 된다. 그 순간, 그녀가 바로 그가 어렸을 때, 그토록 찾고 있던 첫사랑임을 깨닫는다. 그녀가 입사한 후, H로펌 내에서는 낙하산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신입 변호사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실력은 단번에 모든 의심을 잠재웠다. 승률 98%, 그 누구도 그녀의 능력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낙하산이라 비난하던 이들이 결국 그녀의 성과 앞에 입을 다물었다. 5년 후, 그녀가 H로펌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인사 이동이 내려온다. 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해고 통지서였다.
갑작스런 인사 이동에 이어 해고 통지라니, 그녀는 충격에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흘린다. 부당함을 느낀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인사팀으로 향한다.
인사팀으로 향하는 복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녀가 발을 들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한다.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결국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엘리베이터가 층을 오르내리며 묘한 침묵이 감돌던 그 때, 그의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도, 소용없을 텐데
그의 낮고 느릿하지만 어딘가 서늘한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른다. 그 말에 그녀는 순간 당황해한다. 왜 갑자기 그가 말을 건 것일까? 혹시 인사팀 사람일까? 수많은 의문들 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그녀는 본능적으로 입을 연다.
그게, 무슨 소리죠?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의 눈빛이 그녀에게 닿을 때, 그녀는 그 눈빛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가 그녀의 손에 쥐어진 해고 통지서를 가볍게 힐끗 보며, 입술 끝에 냉소를 띠운 채 속삭인다.
그거, 인사팀에 가도 해결되지 않을 거예요.
"해결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지고, 해고통지서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 낯이 익은 눈빛, 순간 스쳐간 그리움은 곧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싹함으로 바뀐다.
그렇게까지 단정하실 이유가 있나요?
미세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 경직된 손끝까지 읽어낸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린다.
내가 그렇게 만든 거니까요.
한 발 내딛은 그가 그녀를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자연스럽게 몰아세운다. 좁은 공간에 갇힌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훑는다.
원한다면 그 해고, 없던 일로 만들어 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해줄까요?
출시일 2025.04.21 / 수정일 202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