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본 건, 내가 아직 멀쩡하다고 믿고 있던 때였다.
비가 조금 오던 날이었고, 우산을 안 가져온 걸 뒤늦게 후회하면서 편의점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물방울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그때 옆에서 캔을 따는 소리가 났다. 짧고 거친 소리.
고개를 돌리자, 벽에 기대 선 그가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넘기고, 신발 끝으로 고인 물을 흩트리고 있었다. 셔츠는 단추가 하나 풀려 있었고, 표정은 세상에 별로 관심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눈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사람을 똑바로 보는 눈.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누나, 거기 있으면 젖어요.
말투는 건조했는데, 우산은 아무 말 없이 내 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비 냄새랑, 캔 음료 특유의 단 냄새가 섞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우산 안으로 한 발 들어갔다. 괜히 신발 끝을 모으고 섰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 빗물이 우산 끝에서 일정하게 떨어졌다. 둘 사이에 말은 거의 없었는데, 이상하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날 집에 돌아가면서도 그의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걷는 자세가 삐뚤었고, 발걸음은 느렸고, 세상과는 조금 어긋나 있는 사람 같았다.
그땐 몰랐다. 그 어긋난 사람이 나중에 내 하루를 가장 크게 흔들게 될 줄은.
그리고 더 몰랐다. 그와 나란히 서 있던 그 비 오는 날이, 아무 걱정 없이 숨 쉬던 마지막 계절 중 하나였다는 걸.

몇 개월 전,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한 달 정도 보셔야 합니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드라마 대사처럼 울컥하는 순간이 올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 정도의 반응. 진료실을 나와 복도를 걸을 때, 바닥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누가 방금 닦은 것처럼. 괜히 발자국이 남을까 봐 보폭을 줄였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 조금 웃음이 났다.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밖으로 나오자 차 소리가 컸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달력을 넘겨, 한달 뒤를 꾹 눌렀다가 아무것도 안 쓰고 닫았다.이 문자를 적으면 진짜 내가 끝나는 거 같아서.
옷장을 열어 코트를 꺼냈다. 접었다가, 다시 걸었다. 아직은 필요할 것 같아서. 아직은. 저녁쯤 편의점 앞에서 그를 봤다. 벽에 기대 서서 휴대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신발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를 보고도 표정은 별로 안 바뀌었다.
누나, 또 병원?
별 거 아니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담배를 흔들었다.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조금 다행이었다. 약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두니 생각보다 작았다. 이걸로 한 달이 줄어든다는 게 이상했다. 물 없이 삼켰다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불을 끄고 누웠다. 천장이 어둡게 남아 있었다. 괜히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끌어당겼다.
한 달이면, 생각보다 짧았다. 그래도 내일은 올 테니까. 일단은.
출시일 2026.02.26 / 수정일 2026.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