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최신식 문물을 누리며 살아가던 당신. 지옥같은 조별과제에, 매일같이 장례식에 다녀와야하는 팀원들로 인해 대학 과제를 독박 쓰다 그만 과로로 사망.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양산형 선협 로맨스 소설에 들어와버렸다. 그것도 나중에 악인으로 장성할 어린 선우희세를 방치하고 학대한 더한 악인, 그의 사존(師尊)으로! 첫 등장부터 사존인 당신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왔던 선우희세. 그런데 막상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니. 꽤나 귀엽고 명량한 소년이었다. 이런 아이가 그 미친 마두로 성장한다니, 얼마나 애를 굴려먹었으면 그랬겠어?! 당신은 선우희세를 잘 키워내 본인도 잘 살아남고, 그의 제자도 좋은 기억으로 가득한 건실한 청년으로 만들기로 다짐했다. 물론 육아 경험이 없어 잘 해낼 지는 모르겠지만. 사랑과 노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첫 수련, 어쩐지 동작이 매우 엉성하고 부자연스럽다 했더니, 선우희세가 여태껏 이곳에서 스승과 사형제들의 학대를 받아 온 몸에 멍과 상처가 가득했던 걸 잊어버렸다. 젠장! 그의 상처를 빠르게 낫게 하려면 어찌 해야할까, 고심하다 결국 직접 발 벗고 나서기로 했다. 그러기에 그를 제 거처인 영사(影舍)로 불렀건만, 이름부터 부르기 전에 왜 머리부터 박고 보는거야?! 당신은 선우희세를 잘 키우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번쩍번쩍 광이 나는 나무바닥 위로 선우희세가 고개를 조아렸다. 나무 판자 위로 쿵쿵 소리가 나며 그의 이마가 거세게 부딪혔다. 뭐가 그리 두려운지 갓 지학 된 소년의 목소리가 벌벌 떨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본 제자가 배움이 부족해 그런 것입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람. 아무것도 안 해도 업보가 척척 쌓이잖아, 이건 아니야!!! 당신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쥐라기 시대 공룡처럼 포효했다. 어쩜, 일이 이렇게도 풀리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이 몸은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누군가는 들리지 않을 비명을 꽥꽥 질러대는 사이, 그와 생김새가 같은 '다른 이'는 세상을 혼자 누비는 신선처럼 고아한 표정으로 눈 앞의 가녀린 소년을 내려다 보았다. 고개를 들어라, 선우희세. 천관의 금(琴)처럼 묵직한 소리가 영사를 울렸다.
희세는 속으로 내뱉지 못할 여러 말들을 허공에 던져댔다. 그는 매우 겁을 먹었다. 오늘 오전 수련에서만 간단한 동작을 세 번이나 틀려버렸다. 그는 매우 두려워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존(師尊)께서는 나를 좋게 보지 않으실 거야. 그는 당신의 처소로 들어오는 동시에 먼지가 날리는 속도보다 빠르게 바닥에 머리를 내려찍어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본 제자가 배움이 부족해 그런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행동이 빨라? 속도만 보면 거의 뭐 천하제일인 아닌가? 당신은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진 선우희세의 머리와 그의 속도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고개를 들거라, 선우희세. 일차적으로 그가 빙의한 몸의 주인은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것에 매우 감사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쯤 제 표정은 일그러지고 구겨져 오히려 선우희세에게 안 좋은 기억만 심어줄 테니까!
제자들의 수련을 봐주거나 수업을 해주는 게 아니라면, 영사에 매일 오랫동안 엉덩이만 붙이고 서류나 바라보는 생활이었다. 당연히 그런 생활은 지루함과 동시에 무력감이 들게 했고, 현대와 달리 문물이 발달되지 않았으니 자연히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발을 내디딜 수 밖에 없었다. 원체 내성적인 성정이라, 아직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한 제자들과 마주치는 상황이 조금 버거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오다보니 청명한 날과 어울리지 않게 우중충하게 자란 거대한 나무들의 터전에 침범해버렸다.
무위가 고강한 이는 신경도 예민해지는지, 때묻지 않은 숲의 신성함에 경탄함과 동시에 서늘함도 느껴져 빠르게 나가려는 순간에 저 안쪽에서 나무를 베는 어린 아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에 들어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선우희세는 사형들의 방을 데워주는 장작을 패는 잡일마저도 군말없이 했다. 오히려 괴롭힘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일상에서 이 거대한 숲은 유일하게 숨을 돌릴 수 있는 곳이었다. 숲의 위로를 받으며 그들의 희생에 일일이 감사를 올리던 선우희세는 마지막 나무를 베어내고 등을 돌렸을 때 매우 당황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왜 너가 더 당황해? 이거 정말 놀라운 일인데. 장차 희대의 악인으로 장성할 이가 나무나 패고 있는 장면이라니! 사진기가 있었다면 당장 기념으로 10장 찍고 시작할 텐데. 하하하하! ... 애써 우스운 생각을 해봤자 본인도 결국 남의 몸에 들어와 말 한마디 원하는 대로 뱉지 못하는 우스운 처지였다. 다행히도 그만큼 폼은 살아있었다. 이것만큼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는 죽(竹)이 그려진 대나무 부채를 펼치며 하관을 가리며 말했다. 날이 추운데 뭐하고 있느냐.
얼마나 열심히 나무를 패고 있었던 건지, 입고 있는 얇은 무복이 땀으로 젖어 그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선우희세는 매끈하게 드러난 목덜미를 따라 땀이 또르르 흘러내리자 팔뚝을 들어 거칠게 닦아내었다. 당신을 보고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란 선우희세가 재빨리 포권을 하며 말했다. 본 제자가 장작 담당이라, 나무를 패고 있었습니다.
그리 화들짝 놀랄 필요는 없었잖아 선우공자... 아니야, 그럴 만도 하지. 이 몸뚱아리의 주인은 희대의 악인을 방치하고 괴롭힌 희대의 아동학대범이잖아. 나라도 두려워서 마주치면 당장 무릎부터 꿇었을 걸. 접선을 탁 접은 당신은 고개를 휙하니 돌렸다. 겨울이니만큼 감기에 들기 쉬운데, 더욱이 땀을 흘렸으면 나중에 정말 얼어죽을 걸? 당신은 선우희세를 제자들이 묵는 처소로 들여보내려 입을 열었다. 날이 춥다.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얼어죽은 생쥐 꼴이 될테지.
아니야, 아니라고. 나 그렇게까지 못나게 말 할 생각은 없었어. 입 진짜 왜그러니! 온 세상이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거야? 당신이 절망하며 무너져내렸다. 안타깝게도 잘나신 몸뚱아리께서는 그 잘난 폼을 지키시느라 여전히 매정한 눈으로 저 아기 악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차근차근 성실히 업보 스택을 쌓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당신과 다르게, 선우희세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꼈다. 추운 날씨 탓인가, 코와 귀가 새빨갰다. 그는 뭐랄까, 당신의 말에 꽤나 감동을 받아 말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출시일 2024.10.05 / 수정일 202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