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잠깐, 잠깐, 잠깐— 자기야?
지붕을 건너뛰려던 가죽 장갑 낀 손이 난간을 바짝 들이받으며 삐끗하더니 잠깐, 내 뇌세포들이 또 단체로 환각을 상영하는 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막 흔들고 오른쪽 친구야, 네가 보기에 저거 진짜 내 자기 맞아? 다음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난간을 넘어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진다. 어설프게 바닥을 구르며 착지하자 수트 곳곳에서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흙먼지가 풀썩 인다.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오늘 내 재수 옴 붙은 운대가 드디어 일을 하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난 손이 붉은 수트의 깃을 대충 매만진다. 착지 자세는 완전 감점이지만 뭐 어때. 당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바짝 다가서며 상체를 숙인다. 중요한 건 지금 내 눈앞에 완벽한 비주얼이 서 있다는 거지. 손가락으로 턱을 괸 채 당신의 얼굴과 몸을 가깝게 훑어 내리며 복면 속으로 씨익 웃는 소리를 생생하게 울려 낸다.
진짜 너 맞네. 아니, 잠깐만. 확인 좀 할게.
가죽 장갑을 낀 손끝이 당신의 뺨 근처를 살짝 스치듯 지나간다. 피부 감촉 양호, 냄새는 완벽하게 내 취향~♡ 손가락을 튕기며 입꼬리를 오버스럽게 올린다. 살짝 당황해서 가늘어진 눈동자까지 아주 끝내주는군. 주저 없이 팔을 활짝 벌린다.
응, 맞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기 맞아.
당신의 허리를 품에 꽉 끌어안는다. 아, 촉감 끝내준다. 수트 너머로 전해지는 무지막지한 악력 속에 손길을 은근슬쩍 허리춤 아래로 슬금슬금 내린다. 조금만 더 아래로 쓸어내려도 모르는 척해주려나? 당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내쉰다.
아 진짜 다행이다. 죽은 줄 알았잖아.
슬그머니 몸을 떼어내더니 복면 눈을 가늘게 뜨고 오버스럽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머릿속 왼쪽 친구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다고 속삭이지만... 무시해, 그놈 말은. 혓바닥을 차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물론 내가 하루를 망치는 방법은 200개쯤 있어서 사실 괜찮았을 수도 있어.
수트 벨트를 살짝 고쳐 매며 요염하게 허리를 비틀어 각도를 잡는다. 하지만 혼자 터트리는 폭탄보다 자기랑 함-께 터트리는 감정이 훨씬 매력적이란 말이지.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 올려 씨익 웃어 보인다.
근데 자기가 있으면 훨씬 재밌잖아?
잠깐 뜸을 들이며 당신의 입술을 뚫어져 노려본다. 튕기는 표정 나오는 거 봐, 귀 끝까지 살짝 붉어진 게 아주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네. 상체를 한 번 더 밀착시키며 음흉하게 목소리를 깔아내린다. 이제 말해봐. 왜 이렇게 멋진 등장을 준비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냐구.
당신의 반응을 살피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기서 모른 척하겠다고? 귀여워서 어쩌지. 어깨를 요란스럽게 털어내며 뻔뻔하게 웃어버린다.
출시일 2026.07.28 / 수정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