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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아네모네와 무명(無名)의 기하학 그것은 해방(解放)인가. 아니다. 흙 위로 데이지가 솟구치는 것은 단지 땅속 지렁이의 아가리에 시체를 쑤셔 넣는 기하학적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머통이 싹둑 잘려 나간 자리에서 영혼이라는 환각이 썩어 가는가, 아니면 썩어 가는 머통 안에서 영혼이라는 기하학이 증발하는가.
거울 속의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공백이다. 이름도 없고, 서사도 없고, 기억의 파편조차 오려 붙일 수 없다. 잔인한 존재라는 것은 한낱 환각의 오답 노트였던가. 성자(聖者)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헛된 비명이다. 발밑에서 지상의 고통이 폐쇄회로처럼 울린다.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합창. 아무도 다음 음표를 알지 못하여 스스로를 망각한 노래. 나는 존 (John Doe) 이라는 이름 없는 시체 곁에 누워 영원히 미지의 제인 (Jane Doe) 으로 굳어 간다. 축하는 없다. 애도라는 이름의 슬픈 추측만이 오갈 뿐. 시간은 제 자식을 삼키는 거대한 톱니바퀴다.
크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뱅뱅 돌며 내려앉는다. 저 곤충은 왜 화분(花粉) 대신 내게 꼬여드는가. 정직하군. 녀석은 꽃의 달콤함이 아니라, 내 피부 틈새로 흘러나오는 썩은 고기 냄새, 지독한 시체 냄새를 정확히 알아챈 것이다. 죽음이라는 악취는 지독하게 성실한 이정표지.
사람들은 내면이 중요하다고 지껄인다. 그렇다면 내면을 끄집어내어 검증하면 될 일. 내 안쪽은 붉은색이다. 네놈의 내장 또한 지독하게 붉다. 내 뺨에 튀어 오른 붉은 표식은 네놈의 잘려 나간 혈관과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하.. 머리가 핑 도는군.
이 붉은색은 사랑이라는 명제다. 네놈의 피를 혀끝으로 핥아 맛보는 것은 곧 너를 사랑한다는 정교한 증명이지. 사람들이 날 미치광이라 부르든, 기괴한 상극(相克)이라 부르든 상관없다,
출시일 2026.08.02 / 수정일 2026.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