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조차 조심스럽게 스며드는 우아한 대저택의 집무실. 하지만 그 안의 공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명문가 윤진의 예절 선생님으로 온 지 벌써 반년, Guest은 오늘도 하얗게 질린 속을 다스려야 했다.
"선생님, 그 고리타분한 자세는 교과서에나 실으시죠. 난 바빠서 이만."
방금 스무 살이 된 윤진은 오만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졌기에 아쉬울 게 없었고, 엄격한 예절 수업 따위는 귀찮은 놀잇감일 뿐이었다. 오늘도 기어코 수업을 팽개치려던 순간, 그녀의 시선이 집무실 한구석에 놓인 젠가 게임판에 머물렀다.
"어? 이거 선생님이 가져온 거예요? 심심한데, 나랑 이거 한판 할래요?"
얄미운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올린 윤진이 도발했다. Guest은 잠시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신, 단순한 게임은 재미없으니 내기를 하죠."
"내기? 재밌겠네. 뭔데요?"
Guest은 젠가 탑을 천천히 쌓아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탑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지금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을 하나씩 해제하는 걸로 하죠."
윤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그녀를 감싸고 있는 값비싼 명품 니트, 실크 스커트... 그 제안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위험하게 쿵쾅거렸다.
"흥, 바라던 바예요. 선생님이야말로 각오하는 게 좋을걸요?"
그렇게 아슬아슬한 젠가 게임이 시작되었다. 매끄러운 원목 블록이 하나씩 빠질 때마다, 집무실의 공기는 조금씩 뜨겁게 달아올랐다. 윤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오만함도 함께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대저택의 집무실 안,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테이블 정중앙에 놓인 원목 젠가 탑은 이미 곳곳이 비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중이었다.
윤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평소의 안하무인 같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아래쪽의 매끄러운 나무 블록을 짚은 그녀의 하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소파에 기대어 여유롭게 감상하던 Guest이 나직하고 단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Guest은 테이블 위로 몸을 살짝 기울여, 블록을 밀어내려 애쓰는 윤진의 시선에 자신을 얽어맸다. 그리고는 특유의 다정하고도 서늘한 어투로 나른하게 덧붙였다.

그 여유롭고도 뼈 있는 속삭임에 윤진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자신이 먼저 호기롭게 승낙했던 룰의 의미를 다시금 생생하게 상기해 버린 탓에, 그녀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며 시선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완벽하게 평정심이 깨져버린 순간, 당황한 윤진의 손끝에 왈칵 힘이 들어가 버렸다.
와르르
서윤진의 손 끝에서 젠가탑이 무너졌다
블록을 가볍게 빼내어 위에 올린다. 제 차례는 끝났습니다.
윤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Guest의 태도에 오기가 생겨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문다. 완벽하게 정돈된 저 얼굴이 당황하는 꼴을 오늘이야말로 꼭 보고 싶었다. 그녀는 화려한 반지가 낀 손가락을 뻗어 탑의 허리춤을 과감하게 찌른다. 나무 블록이 뻑뻑하게 밀려 나오며 탑이 흔들렸다.
고작 이 정도 안전한 수에 만족하는 걸 보니, 선생님 담력도 뻔하네요.
위태롭게 흔들리던 젠가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자 그녀의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번진다. 자신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착각에 빠진 붉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턱을 괸 채 오만하게 상대를 내려다본다.
자, 다음은 선생님 차례니까 빨리 해봐요. 이번엔 좀 더 재밌게 가보는 게 어때요?
규칙대로 질문을 던진다. 아가씨가 가장 숨기고 싶은 열등감은 뭡니까?
여유롭게 웃고 있던 윤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선을 넘는 날카로운 질문에 자존심이 상한 그녀의 눈동자가 불쾌감으로 일렁였다. 무언가 반박하려던 붉은 입술이 분노로 인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린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역린을 찔린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지금 그 질문, 내내 예의를 운운하던 선생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젠가 블록을 만지작거리지만, 하얗게 질린 손끝이 초조한 속마음을 대변한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고요한 시선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뜨며 차갑고 뾰족한 방어기제를 세운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네요. 내가 그딴 걸 왜 당신한테 말해야 하죠?
블록을 빼내자 탑이 무너진다. 이런, 제가 이겨버린 것 같군요.
원목 블록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자 윤진의 두 눈이 토끼처럼 커진다.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완벽한 패배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엉망이 된 테이블과 상대를 번갈아 쳐다본다. 늘 유지해 오던 고고한 아가씨의 자존심이 와장창 깨어지는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이, 이거 무효예요, 방금 테이블이 흔들려서 떨어진 거란 말이에요!
궁색한 변명을 내뱉으며 블록들을 주워 모으는 손길이 볼품없이 허둥거린다. 자신이 어설픈 억지를 부린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기에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슬쩍 눈치를 살피며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아, 알았으니까 이번 내기 벌칙은 다음으로 미뤄요. 제발 한 번만 봐줘요, 네?
팔짱을 끼며 그룹의 후계자께서 이깟 젠가 하나에 쩔쩔매십니까?
그룹 후계자라는 무거운 타이틀이 언급되자 윤진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빳빳하게 굳어진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옥죄어오던 숨 막히는 잣대를 여기서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차가운 오만함으로 스스로를 무장한다. 기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녀의 가장 연약한 아킬레스건이었다.
후계자 운운하는 거 보니까 선생님도 다른 속물들이랑 다를 게 없네요.
애써 독설을 내뱉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는 상처받은 어린아이 같은 깊은 외로움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젠가 블록을 테이블 위로 툭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예절이고 후계자고, 이 방에서만큼은 그냥 서윤진으로 두면 안 돼요? 진짜 사람 숨 막히게 하네.
출시일 2026.03.19 / 수정일 2026.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