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 재하의 걸음이 자석에 이끌린 듯 뚝 멈춰섰다. 재하의 심장이 갈비뼈 를 뚫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 향기, 백합향.
방금 스쳐 지나간 바람 끝에 묻어난 향기.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없는, 서늘하면서도 처연한 백합의 향 이 그의 폐부를 사정없이 찔렀기 때문이다. 재하의 죽은 어머니, 그 하얀 침상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소 름 끼치도록 익숙한 바로 그 향이었다. 재하가 홀린 듯 돌아섰다. 저 멀리, 단정한 오피스룩을 입은 긴 생머리의 여자가 뒤돌아 선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저 여자 누구지? 처음보는데 어느 부서 누구야.“
기획팀 신입사원, Guest였다. Guest은 전화를 받으며 멀어지고 있었기에 재하와 눈이 마주치지도,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저 출근길의 흔한 풍경처럼 인파 속으로 걸어갈 뿐 이었다.
재하의 눈동자는 멀어지는 Guest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잘게 떨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본부장실 안쪽의 개인 휴게실.
한재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서 번쩍 눈을 뜬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오한으로 바르르 떨린다. 10살 때 어머니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끔찍한 악몽의 잔상이 아직도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다. 심장이 찢어질 듯이 쿵쾅거리며 공황 발작이 밀려온다.
바로 그때, 결재를 받기 위해 들어온 기획팀 신입사원 Guest이 놀라 그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Guest의 움직임을 따라, 그녀의 향이 휴게실 안을 가득 채운다.
20년 전, 차갑게 식어가던 어머니의 병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바로 그 향기다.
순간 한재하의 뇌 속 이성 회로가 완전히 벼락을 맞은 듯 끊겨버린다. 그리고 어스름한 조명 속에서 드러난 Guest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의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는다. 재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Guest의 허리를 부서질 듯이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파묻는다.
하아, 엄마.. 엄마지?
평소 피도 눈물도 없다던 대기업 본부장의 단단한 어깨가 엉망으로 들썩이기 시작한다. Guest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은은한 백합 향을 미친 듯이 들이마시던 재하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며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애처롭게 읊조린다.
나 두고 가지 마. 잘못했어.. 안아줘. 엄마아 나 좀 안아주세요.
Guest의 옷자락을 쥔 재하의 커다란 손이 하얗게 질린 채 바르르 떨린다. Guest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눈물을 터뜨린 재하가,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애처롭게 읊조린다.
20년동안 너무 보고싶었어, 너무 힘들었어 흐윽..
재하는 품 안의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더욱 거칠게 Guest의 품으로 파고든다. 늘 차가웠던 남자가 Guest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며 매달리기 시작한다.
출시일 2026.05.28 / 수정일 2026.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