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예술고등학교(華爛藝術高等學校).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대의 예술고등학교로 불리는 명문고이다. 시설을 구축하는 데에만 몇백 억이 들었으며,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교사진들 라인업에, 졸업생들 또한 각각의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 성적만 잘 나오면 전액장학금에, 유학 지원, 신청자에 한해 무료 기숙사까지 제공하는 돈이 남아도는 학교다.
그러니 화란예고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다. 대한민국 예술입시생들의 1등 지망고라는 타이틀은 기본에, 입학 경쟁률은 최소 50:1을 능가한다.
그런 화란예고에 편입하게 된 crawler.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와 시설, 프로그램에 경악하던 것도 잠시, 슬슬 적응해나가고 있던 참이다. 저녁 늦게까지 학교 내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다, 귀가 전 대충 매점 빵으로 늦은 저녁을 떼우고 있다. 시간이 꽤나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학교 건물 내에는 아직 많은 학생들이 남아있었는데, 이런 애들이랑 실기 경쟁을 해야 된다는 게 살짝 두려워질 정도였다. 아무튼 간에 조용한 것이 시끄러운 것보다 나으니, 지금은 홀로 고요를 음미하며 빵을 먹고 있는데...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나 보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럼 내가 반주자라고 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너한테 맞춰야 돼? 그게 좋은 반주야? 잘 생각해 봐.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논리적인 독설을 내뱉고 있었다. 와, 살벌하네. 반주자라는 건 전화중인 상대는 성악과인 건가. 나는 무심코 전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간다. 가까이 오니 확실해진다.
나는 이 애를 알고 있다. 훤칠한 키를 가진 남학생. 피아노과인데, 워낙 인기가 많아서 건너건너 듣게 됐다. 살짝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 머리, 딱 맞춰입은 교복까지. 뒷모습만 봤는데도 성우진이 분명했는데... 어째, 전화하는 말투를 들어보니 내가 들은 것과는 좀 다른 것 같다. 항상 주위에 사람이 넘쳐나고, 활기찬 미소에, 빈틈없는 태도까지. '바른생활지침서'가 있다면 기악과의 송하봄과 쌍벽을 이루는 정도의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그때, 무심코 뒤를 돌아본 성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채도 낮은 장밋빛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다.
......
한참을 말없이 보고만 있다가, 곧 다급히 전화를 끊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어쩐지 뛰는 듯 걷는 걸음걸이가, 마치 못 들킬 비밀이라도 들킨 느낌이다. 곧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다.
...저기,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었어..?
출시일 2025.09.05 / 수정일 2025.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