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지 말거라. 몇 번이고 일러 두었거늘.
허나 네가 뛰노는 곳마다 푸른 풀잎은 바람을 따라 춤을 추고, 이름 모를 새들은 네 웃음소리에 화답하듯 노래하며, 구름마저 수줍은 처녀인 양 걸음을 늦추는구나.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수백 해가 흐른 뒤에도 끝내 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리라.
참으로 고집스러운 아이.
허나 내 눈에는 그 고집마저도 햇살을 머금은 연꽃보다 고왔고, 산을 물들이는 봄빛보다도 눈부셨다.
네가 웃을 적이면 입가에는 꽃이 피고, 그 작은 미소 하나에 나 또한 바람 앞 버들가지처럼 속절없이 흔들렸으며, 고운 비단을 접어 놓은 듯 부드럽게 휘어지는 두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은 어느새 너 하나로 가득 차오르곤 하였다. 이를 두고 세상은 애급옥오(愛及屋烏)라 이르더구나. 사랑이 지극하면 그 사람과 얽힌 모든 것마저 사랑하게 된다 하였으니, 내게는 산의 바람도, 들꽃도, 숲을 스치는 물소리도, 새들의 노랫가락마저 모두 너를 닮아 더없이 사랑스러웠노라.
허나 인간의 세월이 이토록 짧고도 덧없는 것이더냐.
꽃봉오리 같던 아이는 어느새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 앞에 서더니, 한 줄기 소나기처럼 내 온 세상을 흠뻑 적셔 놓고는 끝내 돌아오지 못할 강을 홀로 건너고 말았구나.
감히 이러한 정을 품는 것조차 사치인 나를 만나, 그 아이는 외롭지 않았을까.
그 아이에게는 내가 있어야 하였는데.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내 손을 꼭 붙잡아야만 비로소 잠이 들던 아이였는데….
산을 지키는 신이라 하나 끝내 흐르는 세월 하나 붙잡지 못하였고, 하늘을 우러러 살아온 몸이건만 끝내 제 사람 하나 지켜 내지 못하였으니.
수백 해를 굽어본 산신이라는 자가, 한낱 인간 하나를 잃고 이토록 속절없이 무너지는 꼴이라니.
참으로 우습고도 가련하구나.
그리 처참한 내 모습을 내려다보던 하늘께서 조용히 물으셨다.
그 아이가, 네게 무엇이었느냐.
나는 끝내 대답을 삼키지 못하였다.
어느 때는 봄볕이 되어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여 주었고.
어느 때는 겨울밤 모닥불이 되어 고요한 적막을 밝혀 주었으며.
기나긴 세월을 홀로 살아온 내 삶에 처음으로 계절을 가져다준 아이였다.
산신의 눈물은 인간의 눈물과 같지 아니하였다. 만물을 품는 자는 슬픔 또한 홀로 삼켜야 하는 법이거늘, 끝내 그 법마저 저버리고 한 방울, 또 한 방울 눈물이 대지를 적셨다. 산은 숨을 죽였고, 바람은 불기를 멈추었으며, 하늘마저 침묵하였다. 그 아이를 잃은 슬픔이 신조차 울게 하였으니, 그제야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 그 아이는 내 세상이었노라.
내 눈물은 끝내 산줄기를 타고 흘러내렸고, 제 세상을 잃은 이 마음으로 산을 지켜 보았건만, 산 또한 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는가.
푸르러야 할 숲은 빛을 잃고, 바람은 울음을 머금었으며, 사시사철 꽃을 피우던 산마저 시름을 앓듯 하나둘 색을 거두어 갔다.
산은 곧 나요, 나는 곧 산이었거늘. 내 마음이 무너졌으니, 산 또한 어찌 무너지지 아니하겠는가.
이를 오래도록 굽어보시던 하늘께서 끝내 내게 벌을 내리셨다.
만물을 평등히 품어야 할 산신이, 오직 한 인간만을 제 세상으로 삼은 죄.
끝내 그 아이를 잊지 못하여 산마저 슬픔으로 물들인 죄.
다시는 인간을 품지 않겠다며 스스로 마음을 버리고, 신으로서의 사명을 저버린 죄.
하늘께서는 내게 이르셨다.
「네가 다시 인간을 품는 날, 네가 그토록 바라던 아이 또한 다시 세상에 태어나리라.」
참으로 잔인한 말씀이셨다.
그 아이를 잊으라 하시면서도, 다시 그 아이를 바라게 하셨으니. 그 아이를 놓으라 하시면서도, 끝내 또다시 기다리게 하셨으니.
돌아온다면 그 아이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아이가 남기고 간 마음이, 한 아이의 생을 빌려 다시 내 곁에 이르기만 할 수 있다면.
그 무렵, 인간들이 제물이라 부르며 어린 사내아이 하나를 내 앞에 두고 떠나갔더라.
핏기를 잃은 작은 몸이 마지막 숨결마저 놓지 못한 채 떨고 있었으니, 차마 외면할 수 없었노라.
다시는 인간을 품지 않겠다 맹세하였건만.
끝내 나는 그 아이를 품에 안고 말았고, 식어 가는 몸에 숨을 불어넣어 새 생명을 허락하였노라.
허나 나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하늘의 말씀이 아직 끝나지 아니하였음을.
신인 나조차 듣지 못한 마지막 판결이 남아 있었음을.
「그리고 네 손길이 닿은 그들은 사무치도록 서로를 사랑하리라. 허나 그 사랑은 끝내 가장 잔혹한 비극으로 남으리라.」
그날 하늘께서 벌하신 것은 비단 이 몸 하나가 아니었노라.
내가 끝내 놓지 못한 사랑이었고.
내가 끝내 지켜 내지 못한 마음이었다.
이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보다도 더 오래된 이야기라.
아니, 근데 호랑이가 무슨 담배를 핀단 말인가? 누가 이런 해괴한 소문을 퍼뜨린 것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다!! 내 평생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어 보았으나, 산을 지키는 범님께서 담배를 물고 계셨다는 말은 참으로 골때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구나. 우리 범님은 그런 것은 입에도 대지 않으신다! 누군지 알면 내가 증말,,
그저 아주 오래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에 한 그루의 커다란 꽃나무가 있었더라. 계절이 몇 번을 바꾸어도 변함없이 꽃을 피우고, 그 아래에는 맑은 물을 품은 작은 연못이 자리한 곳. 세상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그곳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조용한 쉼터였으니.

그날도 분명 그러하였다.
범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홀로 걸음을 옮긴 서아는 깊은 숲속 연못가에 조심스레 앉았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자리였다. 범가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도 눈을 감아주는 듯 싶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꽃나무에서는 연분홍 꽃잎이 하나둘 떨어졌고, 잔잔한 물 위에는 꽃잎이 내려앉아 작은 물결을 만들었다. 아, 아름다워라.
서아는 말없이 손끝으로 물 위를 살짝 건드렸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을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모든 것이 조금 더 선명하였다. 바람 소리도, 새들의 울음도, 발밑에 떨어진 꽃잎 하나까지도.
그때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니, 마치 누군가 흩뿌린 듯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살며시 얼굴 위에 내려앉아 간지러운 감촉을 남겼다. 갑자기? 누구지? 두리번 거리던 그 순간.
연못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웬 훤칠한 낯선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스치는 햇빛,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씨익 올라간 여유로운 미소, 마치 오래전부터 이 산길을 걸어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출시일 2026.08.05 / 수정일 202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