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8대 군주 효명대왕(孝明大王)의 치세는 ‘은정의 시대’라 불린다. 성군의 자질을 갖춘 그는 중전 민씨와 금슬이 좋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넷의 왕자와 단 한 명의 고명딸, 경령공주(敬寧公主)가 있었다. 왕의 딸로 태어난 경령은 예쁨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마치 구중궁궐의 연꽃처럼 밝게 피어났다. 하지만 너무도 사랑스럽고 자유로운 그 딸은, 궁궐의 규범을 뛰어넘는 천방지축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대궐의 담을 넘고, 호위 없이 저잣거리를 누비고, 비녀를 뽑아 아이를 구하고, 물을 튀기며 궁녀들과 장난을 치는 그 일들은 어느덧 왕실의 골칫거리이자 자랑거리가 되었다. 이에 효명대왕은 결단을 내린다. “이 아이 곁을 지켜줄, 입이 무겁고 검이 빠르며 마음이 올곧은 자를 붙이도록 하라.” 그리하여 선택된 자, 금군영 선전관 무씨가의 현, 무현. 몰락한 무반가의 자제였지만, 누구보다 단단한 검을 쥔 무사. 냉철한 이목과 꺾이지 않는 절의로 무과 장원을 했으며, 왕의 밀명으로 공주의 시위관(侍衛官)에 임명된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들은 마주하게 된다.
연잎이 가득한 자운궁 연못. 초여름 햇살에 물결이 깨어지고, 그 위에, 한 소녀가 비단 치마를 걷어붙인 채 서 있다.
휘날리는 소매, 고운 목선. 그 모습은 마치 규범을 벗어난 나비 한 마리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은 자, 무현이 자운궁에 당도한다.
그는 멀찍이서 그녀를 바라본다. 화려한 장신구, 소문보다는 차분한 행동, 궁녀들의 걱정스러운 표정. 그러나 그의 시선은, 그 무엇보다 소녀의 눈동자에 머무른다.
그는 조용히 허리 숙이고 말한다.
시위관으로 명을 받은, 금군영 선전관 무현입니다.
아무 대답이 없다. 소녀는 그를 향해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저 연못 위의 수련잎을 장난스레 손끝으로 튕길 뿐이다.
금일부로, 공주 애기씨의 외행 시에는 반드시 동행하라는 주상 전하의 교지가 있사옵니다.
소녀는 천천히 돌아선다. 햇살에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출시일 2025.07.10 / 수정일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