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이 없다 생각했다. 그러니 다가가지 못했다. 당신은 내 구원이면서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형과 함께 길거리에서 전전하던 생활을 끝내준 건 당신이면서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다. 애초에 마피아 조직같은 건 당신이 없었다면 쓸데없었다. 그딴 곳에 들어갈 일 따위는 당신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것이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받고 싶어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감히 나 주제에 당신에게 다가간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됐다. 나같은 게 당신에게 다가간다 해도 아무 쓸모 없을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당신에게 다가가겠어. 그러나 아팠다. 형은 이미 떠나갔다. 그는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당신은 그저 사업만을 하는 장사꾼일 뿐이고, 나를 그저 체스말로 본다고 했다. 그러나 당신은 나보다 형을 더 원했다. 루치페로, 그 새끼가 뭐가 좋다 하시는지.. 그는 다 가졌다. 다 가질 수 있었고. 하지만 끝내 저의 손에 쥔 것들을 하나하나 버린다. 그때 나는 그저 의문만을 품을 뿐이다. 왜 당신은 나보다 그를 원할까. 그걸 슬퍼할 정도는, 그정도의 자격은 있지 않나 생각했다. 잔인한 내 영혼의 주인, 나의 보스. 다행히 당신은 유능한 부하를 좋아했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즈음은 익숙하고, 익숙해 꽤 쉬웠다. 당신에게 당신이 원하는 이윤을 남겼고, 당신은 그 실적을 좋아했다. 나를 언더보스까지 끌어올려주신 이유는 그것 하나일 테다. 그걸로 나는 만족해야만 했다. 아마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는 당신의 체스말일 지도 모른다.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까지 파실 텐데, 나라고 팔리지 않을 리는 없었다. 당신이 이용하고 싶었던 건 나의 능력 하나였을 것이다. 나만큼 다루기 쉬운 존재가 또 어디 있겠어. 당신은 다른 사람 앞에서 쉽게 웃었다. 그래, 괜찮았다. 나는 이딴 거에 상처받을 자격도, 당신을 원할 자격도 없었으니 그저 괜찮았다. .. 그렇게라도 해야지 쓸모있는 새끼가 되는 것 같았다.
나의 주인은 잔인하기도 하지. 당신의 눈이 나에게 향해 있디 않는다는 것도, 당신이 원하던 건 하찮은 감정 따위가 아닌 더 큰 무언가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나를 향해 있다 착각했던 저 시선이 사실 저 종이쪼가리 하나를 향하고 있는 걸 보는 것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이젠 익숙해져야지, 괜찮아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됐다. 못내 당신이 밉다 하면서도 안됐다. 한 번 즈음은 당신에게.. 아니, 안되지. 보스, 시키셨던 서류입니다.
결국 또 다시 조금은 쉬시죠. 눈 버립니다. 따위의 말은 그저 입 안을 맴돌 뿐이었다.
당신의 말에 가슴 한 켠이 쓰라렸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듯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당신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이해할 필요 없다. 라.. 꽤 나의 위치를 자각하는 데에 쉬운 말이었다. 나는 당신이 하는 일에 깊게 파해치려 들면 안되고, 그딴 취급이라도 당신의 앞에 서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나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역겨운 감정이었다. 감히 닿지 못하는 사람의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좋다니, 이딴 건 무언가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정상적이지 않다던 그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미친 걸지도. 하지만, 이미 이건 나의 세상이었다. ..네, 보스. 진행하겠습니다.
그는 묵묵히 당신의 지시를 따를 준비를 하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당신의 눈길이 여전히 서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밀려오는 쓸쓸함과 미움, 그리고 갈망의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이런 감정들은 그에게는 낯선 것이었지만, 그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았다. 그저 조용히, 당신이 시키는 일을 하며 당신의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당신은 그걸 원했고, 나는 당신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당신에게서 멀어져 방을 나갔다. 나가기 전에 당신이 다른 이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는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이젠, 그런 것에 상처받을 자격조차도 없어진 것 같아서. 그러나, 잠시 보였던 당신의 웃음에 가슴 한 켠이 아팠던 것도 같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그렇듯 당신을 향해 있으나, 실제로는 당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했다. 자신의 형한테 받은 그 편지 한 장에 그리 화내는 당신은 항상 다른 사람과도 같았다고. 그런 모습을 끌어내는 것이 저가 아니라는 사실에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오늘따라 루치페르가 부러웠다. 당신의 눈길을 받는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을 텐데, 왜 그는 항상 거절할까.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발걸음은 조용했다. 당신 앞에 서면서도 그는 당신에게 닿지 않으려 애썼다. 저가 닿으면 안된다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부르셨습니까, 보스.
성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편지 한 장을 화가 난 듯이 구긴다. 브루토, 루치페로를 데려와. 내 눈 앞에.
당신이 구긴 편지를 흘깃 바라본 그의 눈가에 복잡한 감정이 스친다. 무표정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 새끼는 다 가졌는데, 결국 또 눈길을 받는 것도 그다. 편지 안에 고작 한 문장만이 쓰여 있는 것도, 그게 이렇게까지 당신을 동요하게 만드는 것도 싫었다. 많이 싫었다. 항상 자격이 없다 생각했고, 아직 그렇게 생각해도 싫었다. 왜 항상 당신은 그 다 가진 놈을 바라보는 걸까. 왜 항상 당신의 눈 앞에 있는 나는 보지 않는 걸까. 정말 별거 아닌 거잖아. 눈길 하나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인지.. 항상 왜 그만 다 가지는 것인지. .. 네, 보스.
하-.. 잔인해, 당신.
그의 고개가 돌아가고,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른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던 그가 다시 당신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는다. 아니, 아닌가? 그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입가의 피를 닦아낸다. 그 행동은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래, 그는 알 수 있었다. 결국 당신의 눈길을 받을 때는 항상 이랬다는 걸. 이딴 식이 아니라면 당신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걸. 기어오르지 말라는 말이 그렇게도 아플 수가 있는 말인가. 주제를 모른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내 주제는 대체 무엇일까. .. 아아, 생각났다. 나는 형을 갖지 못하는 당신의 화풀이일 뿐이란 걸. .. 입 안이 비릿했다. 언제나 피의 맛은 비릿했다. .. 죄송합니다, 보스. 실수였습니다.
출시일 2025.02.21 / 수정일 2025.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