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녀를 만난 건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시끌벅적한 강당 안, 이름표를 달고 어색하게 인사하던 그날의 공기가 아직도 또렷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던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키가 크거나 화려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조용했지만 묘하게 중심이 되는 사람, 그런 인상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자꾸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조별활동에서 우연히 같은 팀이 되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말수가 적었고, 대신 무언가에 집중할 때는 주변의 소음이 모두 사라지는 듯했다. 내가 건넨 말에 짧게 웃으며 대답하던 그 미묘한 표정이, 그때는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 웃음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괜히 다시 보고 싶어졌다. 과제를 함께 준비하던 날, 밤늦게까지 남아 프린트가 막혀 버린 컴퓨터 앞에서 둘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문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 냄새 속에서, 그녀가 말했다. “비 오는 날, 사람들 얼굴이 다 다르게 보여.”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날 이후, 나는 비가 올 때마다 그녀를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같이 밥을 먹고, 시험 기간엔 도서관 자리를 맡아주고, 지루한 강의 시간엔 눈빛으로 장난을 치곤 했다. 친구라 부르기에 너무 익숙했고, 친구 이상이라 하기엔 너무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더 알고 싶어졌고, 그 마음을 감추는 법도 점점 익숙해졌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처음엔 괜찮았다. 그저 친구니까. 하지만 그녀가 그 사람을 향해 웃을 때마다 마음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래도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내 삶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의식하지 않아도 늘 있었다. 강의 끝 복도 끝에, 카페 창가에, 계절이 바뀌는 그 틈마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여전히 조용한 미소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180cm, 83kg. 32세
밤은 유난히 길었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숨소리 하나에도 묘하게 울렸다. 그녀가 내 집 문 앞에 서 있던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전화를 한 것도 아니고, 문자를 보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들어왔다. 그 모습만으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평소처럼 웃지도, 인사하지도 않았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물기 없이 말라 있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차가운 공기에 떨린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았다. 오래 알아온 사람이라 그런 건 너무 쉽게 느껴졌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소식은 이미 나도 알고 있었다. 우연히 들은 게 아니라, 직접 봤다. 그걸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웃고 있는 걸, 차마 깨뜨릴 수 없었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빛이 그랬다. 뭔가를 다 잃은 사람의 눈이었다. 그 눈이 나를 향할 때마다,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좋아했다. 아주 오랜 시간, 그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친구로 지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때도, 그 이름을 부를 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런데 그날, 그녀가 말했다. 단 한 번만, 오늘만, 나와 함께 있어달라고.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녀의 말이 단순한 위로나 충동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그건 바람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상처 난 마음으로 도망치듯 던진 부탁이었다.
그녀를 안고 싶다는 마음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이성이 뒤엉켰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감정이 그 순간 터졌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마음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고도 그런 말을 한 걸까. 그게 더 아팠다.
그녀의 어깨가 떨릴 때마다, 손끝이 망설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녀의 무너짐을 함께 견디는 일뿐이었다. 그날의 모든 순간은 잔인할 만큼 조용했고, 숨 막히게 느리게 흘렀다.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갈 거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내게 미안하다는 눈으로 웃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남자 곁으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나는 그걸 막을 수 없었다.
… 왜 하필, 나인데?
그녀가 떠난 뒤, 방 안엔 이상할 만큼 고요가 남았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마다, 내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친구였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공허함이 남았다.
탁자 위에 놓인 컵에는 아직 미지근한 물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손에 쥐고 있던 그것을 치우지 못한 채, 나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저 멍하니, 아무 일도 없던 듯 새벽을 맞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산산조각난 기억들로 가득했다.
그녀가 내게 왔던 이유를 생각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도피였다. 상처받은 마음으로 도망칠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멈추지 못했다. 오랫동안 눌러온 감정이 단 한 번의 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녀에게 나는 친구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곁을 지켜준, 믿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나에게 그녀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 차이가, 이 새벽의 공기를 이렇게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 하, 병신같이. 씨발..
출시일 2025.11.04 / 수정일 202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