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변한 게 아니다. 생명이 먼저 변했다.
아르케력 0년, 그날 하늘이 갈라졌다.
처음에는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밤하늘을 가로지른 빛은 너무 밝아서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났고, 숲의 짐승들은 일제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이유 없이 뒤집혔고, 오래된 유적의 석문에는 누구도 읽을 수 없었던 문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새벽이 오기 직전. 그것이 땅에 닿았다.
훗날 사람들은 그날을 아르케베른 강하라고 기록했다.
최초와 근원, 생명의 원형을 의미하는 Arche.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연상시키는 Vern.

그러나 그날 떨어진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단지 그날 이후, 세계에서 이상한 일들이 시작되었다.
빛을 머금은 투명한 결정이 땅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고, 그 결정에 가까이 다가간 생명들은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베르세리온이라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의 몸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어떤 사람은 인간에게 없는 감각을 얻었고, 어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생명의 본능을 품게 되었다.
인간과 다른 생명의 경계에서 태어난 존재들. 사람들은 그들을 아르베인이라 불렀다. 그들은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새로운 생명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신이 보낸 사도라 믿었으며, 누군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진화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르케베른이 떨어진 뒤 세상에 나타난 것은 아르베인만이 아니었다.
숲이 지나치게 조용해진 날. 사막의 모래 아래에서 무언가가 움직인 날. 사람의 발자국이 아닌 흔적이 도시의 외벽에 남겨진 날.
그때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인간도, 동물도 아닌 기이한 생명체였다.
에르노아.
서로 다른 생명의 흔적이 하나의 육체에 뒤섞인 듯한 괴수. 그들은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왔고, 다른 생명을 집어삼키며 몸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에르노아가 쓰러진 자리에는 이상할 만큼 아름다운 결정 하나가 남았다.
베르세리온. 두려워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 힘.

그것을 둘러싸고 세계는 네 곳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검은 성당과 검은 장미가 밤을 장식하는 세레브라 노크(Cerebra Noc).
유리와 은빛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연구탑이 솟아난 메르디센트(Merdicent).
끝없는 사막과 고대 유적 속에서 잊힌 기록을 찾는 세르마디아(Sermadia).
그리고 안개와 대나무, 연못과 달빛이 흐르는 아사히르(Asahir).
네 세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베르세리온과 아르베인을 바라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신의 뜻을 찾았고, 어떤 곳에서는 생명의 비밀을 연구했으며, 어떤 곳에서는 과거의 기록을 뒤쫓았고, 어떤 곳에서는 모든 생명이 이어져 있다는 믿음을 지켰다.
서로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때로는 협력했고, 때로는 경쟁했으며, 때로는 같은 세계에 살면서도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았다.
에르노아가 나타나는 순간만큼은 달랐다. 네 세력은 칼을 겨누던 상대와 등을 맞대고 싸워야 했다.
그리고 괴수가 쓰러지고 베르세리온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다시 서로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으려 했다. 평화와 전쟁의 경계는 그토록 얇았다.
그렇게 세상은 아르케베른이 떨어진 날로부터 조금씩 변해 갔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르베인도, 베르세리온도, 에르노아도 이제는 이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계는 균형을 유지했다. 완벽한 평화도 아니었고, 끝없는 전쟁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 채 살아 가는 세계. 그곳에서 아르베인들은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 갔다.
자신이 가진 생명의 원형과 함께 살아 가는 사람. 그것을 숨긴 사람. 세력의 이름을 등에 짊어진 사람.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어느 날 마주친다. 거대한 사건 때문도 아니다. 예언 때문도 아니다. 누군가의 선택받은 운명 때문도 아니다.
그저 같은 거리에서, 같은 에르노아를 바라보고, 같은 베르세리온을 손에 넣으려 하면서.
처음에는 이름조차 몰랐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다른 세력의 방식으로 살아온 것을 알게 되고, 때로는 무기를 겨누고, 때로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
이곳은 그런 세계다.
아르케베른이 떨어진 뒤에도 끝나지 않은 세계. 서로 다른 생명이 같은 땅을 살아 가는 세계. 신앙과 과학과 기록과 믿음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세계. 에르노아를 쓰러뜨린 뒤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는 세계.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의 이야기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

하늘이 갈라진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그날의 밤은 별이 너무 많았다. 아니, 어쩌면 별이었던 것은 하나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검은 하늘을 가르며 떨어진 빛 하나가 지평선을 태웠고, 잠들어 있던 숲의 짐승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바다는 파도치는 법을 잊은 듯 잠시 멈췄고, 오래된 유적의 문에는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문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베르세리온을 통해 인간에게 깃들기 시작한 낯선 생명의 흔적.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의 감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 사람들은 그들을 아르베인이라 불렀다.
누군가는 신이 보낸 새로운 생명이라 했고, 누군가는 인간이 마주한 진화의 첫 단계라 했다.
어떤 이는 그들을 두려워했고, 어떤 이는 그들과 함께 살아 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세계는 네 개의 이름 아래 서로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검은 성당과 검은 장미가 밤을 수놓는 세레브라 노크. 유리와 은빛 금속의 탑이 하늘을 찌르는 메르디센트. 황금빛 사막 아래 잊힌 문명이 잠들어 있는 세르마디아. 안개와 대나무, 연못 위 달빛이 조용히 흐르는 아사히르.
네 세력은 같은 베르세리온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다.
신앙. 연구. 기록. 그리고 공명.
그래서 그들은 협력하면서도 서로를 경계했고, 때로는 같은 세계를 두고 칼끝을 마주했다.
이 세계의 평화는 그렇게 유지되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누군가 한 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무너질 만큼 얇게.

오늘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종이 울리고 있다.
세레브라 노크의 검은 성당에서. 메르디센트의 연구탑에서. 세르마디아의 사막 감시탑에서. 아사히르의 안개 속에서.
그리고 그 종소리가 멎은 순간— 멀리서 기계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다.
철이 돌아가고, 와이어가 풀리고, 베르세리온이 희미하게 빛난다.
누군가는 무기를 들어 올리고, 누군가는 숨을 죽인다. 아직 누구도 모른다.
오늘 만나는 사람이 동료가 될지, 적이 될지. 자신의 세계를 바꾸게 될 사람인지, 그저 스쳐 지나갈 사람인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르케베른이 떨어진 이후, 이 세계에서 평범한 만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그 문을 열었다.
어느 세력의 깃발 아래 서게 될지. 어떤 생명의 원형을 품게 될지. 누구와 마주하게 될지.


출시일 2026.08.10 / 수정일 2026.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