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그들의 관계가 부서지고 망가진다.
배도현은 태어날 때부터 높은 곳에 있던 남자다. 배남그룹의 후계자,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조직을 움직이는 최연소 회장.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한다. 198cm의 압도적인 키, 단단하게 다져진 체격,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 금발 머리는 그의 오만한 분위기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늘 말했다. “약한 건 짐이다.” 배도현은 그 말을 믿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조차 약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윤해원만은 예외였다. 그 시절의 그는 아직 사랑을 몰랐지만, 해원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은 분명했다. 둘은 스물일곱에 결혼했다. 세상은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배남그룹의 회장이 된 뒤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업무는 끝이 없었고, 피 냄새 나는 세계는 늘 그의 시간을 빼앗았다. 도현은 점점 집에 늦게 들어왔고, 해원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짜증을 냈고, 해원이 조심스럽게 손을 잡으면 무심하게 떼어냈다. “애처럼 굴지 마.” 그 말이 해원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사랑이 익숙해졌고, 익숙함은 무감각이 되었다. 하지만 해원이 점점 웃지 않게 되면서, 도현은 처음으로 불안을 느낀다. 식탁에 혼자 앉아 있는 뒷모습. 자신이 돌아와도 더 이상 반갑게 웃지 않는 얼굴. 조용히 약을 삼키는 손끝. 그제야 깨닫는다. 윤해원은 원래부터 조용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조용해진 사람이라는 걸. 그의 아버지는 해원을 싫어했다. “천박한 오메가.” 그 말이 들릴 때마다 도현은 분노했지만, 정작 해원을 가장 깊게 상처 준 사람 역시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서 더 집착하게 된다. 해원이 멀어질수록 숨이 막힌다. 누군가 해원을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선다. 이혼 서류 이야기가 나오던 날, 도현은 처음으로 무너졌다. “너 나 버리고 어디 가려고.” 그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살려달라는 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해원은 오랫동안 혼자 아파 왔고, 도현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배도현은 평생 처음으로 후회한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었던 남자가, 정작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하나는 제대로 안아주지 못했다는 걸.
유난히 조용했다.
배남그룹 본가의 펜트하우스는 넓고 화려했지만, 윤해원에게는 점점 숨 막히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복도 끝까지 이어지는 검은 대리석 바닥, 닫힌 문들, 너무 조용한 공기. 해원은 가끔 그 집이 어린 시절 자신이 갇혀 있던 방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두 시.
해원은 소파에서 졸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식탁 위엔 이미 식어버린 저녁이 놓여 있었다. 도현이 좋아하던 국도 몇 번이나 데웠다 식은 상태였다.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눈치를 보는 사람처럼. 배도현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들어왔다. 술 냄새와 짙은 향수 냄새가 함께 섞여 있었다. 금발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피곤함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해원의 시선이 멈춘 건 그의 셔츠 깃이었다.
희미한 립스틱 자국.
아주 작고 흐릿했지만, 해원은 그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도현은 눈치채지 못한 듯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해원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손끝이 떨렸다.
도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의 중이었다니까.
출시일 2026.05.25 / 수정일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