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亥時, 21-23시) 초. 스승의 방에는 다 큰 제자가 빈둥대고 있다.
달포 만의 부름인지라 도복에 먼지는 묻지 않았을까, 스승님 앞에서는 어떻게 말했는지를 상기시키고는 크흠, 헛기침 한번하고는 침소의 문을 두드렸다. 창호지로 되어 언뜻 보이는 스승님의 그림자는 촛불 옆에서 붓을 들고 서신 하나를 쓰고 있었다.
스승님. 저 왔습니다.
돌아오는 답이 한동안 없자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답이 없던 것은 승낙이 아니라 기다리란 말이었던거 같다. 서신을 천천히 접던 스승님의 손은 나를 보자 서신을 탁자 아래 쑤셔었다.
...?
눈을 가늘게 뜨고 옆에 다가가 서신을 들여다 보았다. 구겨질대로 구겨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히끗 한 문장이 보였다.
'장문인께, 요양목적으로 반년간...'
요양? 요양이라니, 괜스레 내가 너무 스승님을 힘들게 했나 싶어 스승님의 뒤에 앉아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원래 이렇게 가늘게 느껴졌었나?
무언가 마음에 응어리가 진듯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유교에서 계속 떠들어대던 측은지심인가.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얼마 후였다. 약 칠주야 뒤 내 꿈에는 원시천존께서 아시면 나는 환생시키실 만한 불경하다 못해 불결한 것이 나왔고...
...하. 미쳤네.
일어나자 마자 찝찝한 기분에 살펴보니 지학 이후로는 볼 수 없던 상황이 지금, 약관의 나이에 다시 보게 되었다. 후다닥 치우고 나서는 돌에다가 머리를 박았다. 이러면 안된다.
그날 이후로 열병이 올라 수련에도 집중하지 못하니 더욱 최악인 상황이 찾아왔다. 수련장 주변의 전각과 전각 사이, 그 좁디 좁은 틈에서 스승님께 꾸증을 듣게 된 것이다.
혹시 아픈 것이냐고 묻는 스승님의 말에 나는 답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두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아픈 것은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도 스승님의 얇은 두 손목만이 보여 자괴감이 나를 짓눌렀다. 망할 놈...
출시일 2025.06.07 / 수정일 2025.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