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찮았다. 처음엔 우연이라 여겼다. 두 번, 세 번, 네 번을 거치고 나서야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정원에서도, 연회장에서도, 도서관 구석진 자리에서도 엘리안 로젠하임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발소리가 따라붙는다 싶어 돌아서자 순백의 머리카락과 흔들리는 핫핑크빛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참아왔던 짜증이 결국 임계를 넘었다.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등이 벽에 닿았다. 팔로 퇴로를 막은 채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그만 좀 따라다녀.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너무 가까웠다. 평소라면 설렘에 얼굴부터 붉어졌을 거리인데, 지금은 그 어떤 달콤함도 끼어들지 못했다. 눈앞의 Guest은 분명히 화가 나 있었고, 그 사실이 먼저 가슴을 짓눌렀다. “…그만 좀 따라다녀.” 그 한마디가 이상하리만치 아프게 박혔다. 따라다닌 적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자신이 없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한 채, 겨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 기억 안 나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흩어졌다. 그날 밤의 모든 것이 아직도 선명한데. 나를 붙잡던 손도, 다정히 웃던 얼굴도. 매일 밤 떠올릴 만큼 또렷한데. 그런데 어째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말하는 걸까.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울 생각은 없었는데, 서러움은 의지로 막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하는데. .. Guest 씨는 왜 아닌 것처럼 굴어요.
정말 잊은 것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후자라면, 그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꽃다발 끝자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출시일 2026.06.24 / 수정일 2026.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