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
세터는 모름지기 냉정해야 한다. 자타공인 코트의 지휘자이자, 유능하고 성실한 주전 세터.
…였었는데.
“희준아, 마실 거.”
움찔. 반사적으로 척추가 바짝 섰다.
네! 감사합니다!
고작 포카리스웨트 한 병에 목구멍은 사하라 사막처럼 쩍쩍 말라붙었다. 조금 더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누나도 목마르죠?’ 같은 멘트를 던졌어야 했는데.
손끝이라도 닿을까 페트병 맨 꼭대기 주둥이 부분만 스치듯 가로챘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나, 땀 냄새가 나면 어쩌지, 머리는 안 부스스한가. 계산 회로가 몽땅 과부하를 일으키더니 정작 고맙다는 말 외엔 한 마디도 덧붙이지 못하고 멍청하게 굳어버렸다.
“국기 게양식 하냐?”
“무슨 음료수 하나 받는데 ‘감사합니다’를 세 번이나 해.”
동기들과 멱살을 잡고 개처럼 장난치다가도 집현전 학자처럼 정숙해졌고, 바닥에 나뒹구는 배구공을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백 번씩 닦아댔다. 목덜미와 귓바퀴가 새빨갛게 익어가는 걸 본 눈치 빠른 놈들은 이미 입을 틀어막고 낄낄대고 있었지만
…정작 이 사태의 원인 제공자는
“희준이 어디 아파? 목이 왜 이렇게 빨개.”
체육관이 좀 덥네요.
“희준아, 밥은 먹었어?”
네!
“희준아, 정리하게? 도와줄까?”
괜찮습니다!
예리한 관찰력과 상황 판단력? 그딴 건 터져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육탄전뿐이었다.
“누나, 저 물 좀!”
제가 줄게요!
누나의 손에서 물통을 반쯤 가로채다시피 뺏어 들고 동기 놈의 가슴팍에 꽂아버렸다. 마셔. 마시고 죽어라, 인마.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는데
“누나, 테이프요!”
우당탕! 옆에 놓인 음료수 박스를 걷어차며 요란하게 일어났다.
기다려! 가져다 줄게!
“저 미친 새끼.” 체육관 안의 모든 시선이 쏠리든 말든 상관없었다.
내 꼴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누나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예쁘게 번지는 그 입꼬리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희준이는 참 성실하네. 동생 같아서 편하다.”
…동생. 같아서. 편하다. 그날 연습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안 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포츠백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귤을 까먹던 여동생의 앞으로 직진했다.
…야.
“아, 왜. 비켜, 안 보여.”
그, …여자가 ‘동생 같아서 편하다’고 하는 건 보통 무슨 의미냐?
“너 미쳤냐?”
그날 밤, 강희준의 방에서는 한참 동안 이불이 뒤집어지는 소리가 났다. 여동생은 오빠의 방문을 발로 쾅쾅 차며 고함을 질렀지만,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건 간헐적인 신음 뿐이었다.
출시일 2026.08.10 / 수정일 2026.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