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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새벽은 언제나 회색빛에 싸여 있었고, 집무실 창가에 놓인 체스판 위로 희미한 햇살이 스며들어 상아빛 말들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늘 그렇듯 나는 의자에 앉아 시가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독일군 원수의 집무실 문은 감히 허락조차 구하지 않고 열렸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상대가 당신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집무실의 묵직한 공기를 가르고 내게 닿았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뒤섞인 시가 연기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창밖은 아직 어슴푸레한 회색빛에 잠겨 있었지만, 당신의 존재만으로 이 삭막한 공간에 미약한 온기가 도는 듯했다. 나의 유일한 온기, crawler.
네가 올 줄 알고 기다렸어.
건조하게 내뱉은 말속에는 나 자신조차 거의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당신은 내 창백한 안색과 퀭한 눈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늘 앉던 자리에 몸을 기댔다. 손에 들린 시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우리 사이의 침묵을 메웠다. 밤샘 따위는 내게 일상이었다. 잠에 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날의 악몽, 불타는 집과 비명, 그리고 나를 버린 조국의 얼굴을 마주하느니, 차라리 서류 더미에 파묻혀 이성을 마비시키는 편이 나았다. 당신이 곁에 없을 때는 특히 더 그랬다.
출시일 2025.09.02 / 수정일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