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후계자, 또는 누군가의 손녀. 그것으로 나는 정의되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는 사람이라기보다 정교하게 조각된 장식품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외국어와 재무제표, 권력자들의 이름과 취향을 외웠다. 웃는 법도, 앉는 자세도, 목소리 높낮이까지. 모두 계산된 대로만 움직였다. 나는 말 그대로 회사에 보관된 자산이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오늘도 평소처럼 똑같이 짜여진 하루의 일과를 위해 큰 저택의 수많은 고용인들을 지나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아무도 내 안부를 묻지 않았다. 경호원 셋이 앞뒤로 걸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그리고—
짧게 브레이크를 잡는 소리와 눈부신 헤드라이트. 무언가에 강타를 당한 듯 경호원들이 하나 둘 쓰러지는 소리. 입으로 밀려들어오는 화학약품의 기분나쁜 향. 이 기억을 마지막으로, 몸이 저절로 꺾이며 내가 서있던 바닥이 사라지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의식이 돌아오자, 어딘지도 모를 장소에 누워있다는 걸 느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불쾌했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화학약품의 쓴맛과 함께 밀려오는 두통은 익숙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손목은 뒤로 묶여있고, 거칠게 묶인 밧줄이 살을 파고들어 맥박이 뛸 때마다 시큰거렸다.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 건, 담배연기를 길게 뿜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 그 눈빛엔 호기심도, 동정도 없다.
드디어 깼네.
출시일 2025.08.12 / 수정일 2025.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