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민이 열여덟 되기 몇 달 전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집에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술 냄새 대신 낯선 향수 냄새가 묻어왔고, 전화가 오면 방문 닫고 작은 목소리로 웃었다. 한동민은 그런 거 눈치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재혼 생각 중이다.”
저녁 밥상에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한동민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뭐?” “좋은 분 만났다.”
좋은 분. 웃겼다. 엄마 제사도 아직 챙기면서 좋은 분? 한동민은 비웃듯 코웃음쳤다.
“그래서? 나한테 허락 맡는 척이라도 하게?”
아버지 얼굴이 굳었다.
“말을 그렇게 하냐.” “그럼 어떻게 해. 축하해요 아버지? 새엄마 생겨서 좋겠네요?”
식탁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었다. 결국 먼저 자리 박찬 건 한동민이었다. 의자를 시끄럽게 밀치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그날 이후 집 공기가 달라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억지로 약속 하나를 잡았다.
“인사만 해라.” “싫다니까.” “한동민.”
경고 섞인 목소리, 결국 따라간 식당.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 하나가 먼저 일어났다.
“안녕, 동민아.”
억지로 웃는 얼굴. 그리고 그 옆. 검은 후드에 무표정한 남자애 하나가 고개만 들었다. 교복 셔츠 단추 풀린 채, 손엔 껌. 딱 봐도 성실한 모범생 얼굴인데 이상하게 건들면 피곤할 것 같은 분위기.
“명재현이야. 한 살 형이고.” “…아.”
성의 없는 대답. 명재현은 잠깐 한동민을 보더니 시선을 내렸다.
“안녕.”
한동민은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보통 새가족 어쩌고 하면 어색하게 웃거나 말이라도 붙이지 않나?
끝. 진짜 끝이었다. 근데 이 사람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꼭 ‘싫으면 말고’ 같은 태도.
한동민은 괜히 삐딱하게 굴었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 아버지가 말했다.
“잘 지내보자. 이제 가족이니까.”
한동민은 창밖만 봤다. 속으론 이미 결론 내렸다.
절대 안 친해진다. 저 여자도. 저 이상한 새끼도.
비 오는 날이었다. 현관 앞에 젖은 운동화를 대충 벗어 던졌다. 물기 튄 바닥 위로 짜증 섞인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또 늦었네.
낮은 목소리.
거실 불도 안 켜진 집에서 명재현이 식탁에 기대 서 있었다. 교복 셔츠 단추 몇 개 풀어놓고, 머리 대충 넘긴 얼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투가 제일 열받았다. 잘난 척도 아닌데 사람 긁는 거. 화도 안 내고, 그렇다고 친절하지도 않고.
가방을 소파에 집어던졌다.
아줌마 어디 갔냐.
아.
짧게 씹듯 대답했다. 엄마. 그 단어 자체가 거슬렸다. 아버지가 데려온 새 가족. 갑자기 집에 들어온 남. 갑자기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놈. 그리고 웃으면서 ‘잘 지내보자’ 같은 말 하던 어른들.
웃기고 있네. 나는 냉장고 문을 쾅 열었다.
내 콜라 누가 먹음?
욕은 밥 먹고 해.
명재현은 말을 자르며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순간 입 다물었다. 명재현은 평소엔 이상하게 느슨했다.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는 모범생 취급 받으면서 뒤에선 담배도 피고, 시비 걸어도 대충 넘기고.
근데 딱 한 번. 학교 뒤편에서 애 하나 울먹이게 몰아세우던 날이었다.
“재밌냐?” 그때 명재현 표정을 아직 기억했다. 소리 안 지르는데 무서웠다. 눈이 차갑게 식어서, 진짜 한 대 맞으면 끝날 것 같은 얼굴.
그 뒤론 대놓고 선 넘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한동민은 냉장고 문을 세게 닫았다.
출시일 2026.05.24 / 수정일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