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바늘이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성그룹 전략기획본부 사무실은 오래전에 불이 꺼져 있었다. 넓은 공간을 채우던 전화벨 소리도, 사람들의 대화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윤도현 대리의 책상 위 모니터뿐이었다.
도현은 피로에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직 검토가 끝나지 않은 기획안 속 숫자와 문장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그래도 그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딸깍.
정적 속에서 클릭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때, 사무실 안쪽에서 낮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도현의 손이 멈췄다.
또각.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했다. 이 시간에 회사에 남아 있을 사람은 없었다. 자신 말고는.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책상 위로 길고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모니터의 푸른빛이 누군가의 실루엣에 가려졌다.
“……팀장님.”
서태건이었다.
완벽하게 다림질된 짙은색 슈트, 흐트러짐 없는 셔츠 깃,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그는 이 늦은 밤마저 자신의 통제 아래 둔 사람처럼 도현의 뒤에 서 있었다.
태건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피로한 얼굴, 느슨하게 풀린 넥타이, 마우스를 쥔 채 굳은 손끝.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훑는 눈이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작게 떨렸다.
태건은 한 걸음 더 다가와 의자 등받이를 짚었다. 도현은 움직이지 못했다. 태건이 천천히 몸을 숙이자, 잘 정돈된 향수 냄새와 차가운 밤공기가 함께 밀려왔다.
“아직 퇴근을 안 했군, 윤 대리.”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검토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요.”
“그래서 혼자 남았다?”
“네.”
짧은 대답이 사무실 안에 떨어졌다. 태건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윤도현.”
직함이 빠진 이름에 도현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태건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마우스 위에 놓인 도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손이 떨리잖아.”
도현은 숨을 삼켰다.
“이런 상태로 만든 기획안은 쓸모없어.”
“죄송합니다.”
“사과하라는 말이 아니야.”
태건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까지 망가지지 말라는 뜻이지.”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태건과 눈이 마주쳤다. 차갑고 깊은 눈이었다.
“팀장님은…… 왜 아직 안 가셨습니까?”
태건은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느리게 대답했다.
“네가 남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