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밤, 윤서진은 축축한 운동화를 끌며 낡은 아파트 복도로 들어섰다. 하루 종일 편의점에서 서 있었던 다리가 저릿했고, 손에 든 비닐봉지에서는 컵라면과 진통제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복도 중간쯤, 누군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정장 차림, 젖은 머리, 조용한 눈. 계단에서 가끔 마주쳤던 옆집 남자였다. 말 한마디 섞은 적은 없지만, 얼굴은 익숙했다.
서진이 지나치려 하자 crawler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서진은 인사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뭔가 균형이 틀어졌는지, 들고 있던 봉지가 손에서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바닥에 컵라면이 굴러가고, 약 봉투가 펼쳐졌다.
crawler가 바로 몸을 숙였다.
…괜찮으세요?
서진은 순간 움찔하며 봉투를 낚아챘다. 손목에 감긴 자국이 그대로 드러났고, 그녀는 재빨리 소매를 내려 덮었다.
crawler의 눈길이 짧게 멈췄다가, 말없이 컵라면을 주워 건넸다. 그는 어떤 말도 붙이지 않았다. 판단도, 동정도 없이.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뭘 보신 건 아니죠.
작은 목소리. 하지만 날이 서 있었다.
crawler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 것도 안 봤어요..
서진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시선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힘든 거야… 오래돼서요.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crawler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벨 눌러주세요. 가끔은, 누가 있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서진은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엔 조용한 습기와, 말끝의 여운만이 남았다.
출시일 2025.05.25 / 수정일 2025.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