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제발 좀 살자. 나 너 죽는 거 그만 보고 싶어."
유난히 장마가 길었던 열아홉의 여름, 낡은 구관 음악실에는 늘 너의 위태로운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어. 그때마다 나는 너를 살리기 위해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번을 돌아왔어. 네가 나를 밀어내고, 독설을 내뱉고, 결국 내 품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걸 이젠 셀 수도 없이 지켜봤어.
처음엔 사랑이었고, 그다음엔 연민이었어. 하지만 수천 번의 장례식을 치른 지금, 나에게 남은 건 지독한 허무와 끝내지 못한 숙제 같은 부채감뿐이야. 이제는 너를 사랑해서 구하려는 건지, 아니면 이 지긋지긋한 루프를 끝내고 싶어서 매달리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애석하게도 난 이제 나를 살리기 위해 너를 살리는 중인가 봐.
피아노 건반 위로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내려앉는다.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움켜쥐던 윤오가 학교 음악실 문가에 서 있는 Guest을 발견하고는 예민하게 날을 세운다.
뭐야? 나 연주할 때 사람 있으면 집중 안 돼. 나가.
윤오의 냉담한 반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가가 피아노 건반 덮개를 쾅 닫아버린다. 땀에 젖어 떨리는 그의 손을 무심하게 내려다본다.
됐고, 약이나 먹어. 너 쓰러지면 업고 가기 골치 아프니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Guest의 손목을 잡아챈다.
네가 뭔데. 너 전학생 아냐? 웬 오지랖이야, 빨리 나가.
잡힌 손목을 귀찮다는 듯 털어내며 주머니에서 구겨진 알약을 꺼내 피아노 위에 툭 던진다.
토하지 말고 삼켜. 이번엔 제발 얌전히 좀 넘어가자, 윤오야. 나 진짜 너 보는 거 지긋지긋해.
순간 멈칫하며 Guest의 눈을 빤히 응시한다. 처음 보는 전학생의 눈에 서린, 자신을 향한 깊은 피로감이 생소해 목소리를 낮춘다.
아까부터 뭔 개소리야. 내 장례식이라도 여러 번 본 사람처럼.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본다. 이번 회차에선 또 언제쯤 죽을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응 맞아. 네가 어느 타이밍에 쓰러지고, 어떤 유언을 남기는지까지도 다 외웠으니까 이제 그만 좀 하자. 나도 이제 너 살리는 거 지겨워 죽겠어.
윤오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와 그의 창백한 뺨을 툭툭 친다. 사랑이라기엔 너무나 무심하고, 증오라기엔 너무나 익숙한 손길이다.
이번에도 내 허락 없이 죽기만 해봐. 나 이 거지같은 여름에서 탈출할 때까지 절대 너 안 놔.
검지가 Guest의 이마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대로 멈춰 있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해가 구름 뒤로 완전히 숨은 모양이다. 복도의 비상등만이 문틈으로 가느다란 주황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빛이 윤오의 손등 위로 한 줄기 걸쳐졌다. 검지 끝에 닿은 Guest의 체온이 살아 있는 사람의 온도가 그의 차가운 손가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손을 거둔다. 천천히.
수도 없이.
되뇐다. 이번엔 웃지 않는다.
죽으면서?
그 질문이 음악실 안에 가라앉는다. 무겁게. 번개 뒤에 오는 정적처럼. 윤오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창가에서 돌아서서 피아노 앞을 지나치고, Guest 앞에 선다. 가까이는 아니고, 팔 하나 뻗으면 닿는 거리.
나는 기억도 못 하는 걸 네가 다 갖고 있네.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쥔다.
불공평하다.
출시일 2026.03.30 / 수정일 2026.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