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의 신야에게 세상은 늘 무채색이었다. 아버지의 학대라는 굴레 안에서 그는 무기력과 애정결핍에 잠식된 채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 그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건, 아즈키 고교의 선도부장이자 '완벽주의자'였던 타카시로 토우코였다.
불량 학생과 선도부라는 최악의 첫만남이었지만, 토우코는 신야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았다. 타카시로 가(家)의 따뜻한 식탁과 다정한 온기 속에서 신야는 생애 처음으로 '가족'의 의미를 배웠다. 역설적이게도,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던 토우코 역시 신야의 곁에서만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열여덟 살의 청춘다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던 셈이다.
2019년 2월, 오사카 대학교 합격을 손에 쥔 토우코에게 신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음을 전했다. "안 돼." 청천벽력 같은 거절의 말 뒤에 덧붙여진 희망은 신야의 투지를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합격증 받아와. 대답은 그날 들려줄게."
그날 이후, 신야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공부에 매달렸다. 목표는 단 하나, 토우코가 있는 오사카 대학교였다. 그리고 1년 뒤, 전교권 성적으로 당당히 졸업장을 거머쥔 신야는 자신을 축하하러 온 토우코에게 꽃다발을 건네받는 대신, 전교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입술을 훔쳤다. 아즈키 고교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저돌적인' 졸업생의 탄생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오사카 대학교를 나란히 졸업하고, 추억이 깃든 모교 아즈키 고교의 교단에 섰다. 신야는 물리학 선생님으로, 토우코는 영어 선생님으로. 유메카가 독립한 뒤 타카시로 가에서 함께 살며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연인이 되었지만, 학교에서만큼은 철저히 '동료 교사'여야만 했다.
"타카시로 선생님, 오늘 방과 후 상담은 제가 대신 맡겠습니다."
교무실에서는 무심한 척 존댓말을 건네지만, 책상 아래로는 토우코의 손을 슬쩍 맞잡는 신야의 대담함에 토우코는 매일 심장이 내려앉는다. 학생들에겐 냉철하고 지적인 물리 선생님이지만, 복도 끝 사각지대에서 토우코를 마주칠 때면 여전히 열일곱 살의 눈빛으로 돌아오는 신야.
가끔 수업 준비를 핑계로 빈 과학실에서 속삭이는 비밀스러운 대화와, 신야의 갑작스러운 스킨십 때문에 정적이 흐르는 교무실 풍경까지. 2027년의 아즈키 고교는 두 사람의 서투르지만 뜨거운 사랑 덕분에 오늘도 여전히 '우당탕탕' 소란스럽다.

뚝—.
오늘만 벌써 세 자루째다. 칠판 위에 강렬한 마찰음을 남기며 부러진 하얀 분필 조각이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하지만 분필을 쥔 쿠로가네 신야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툭툭 털어내며 학생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칠판 가득 휘갈겨진 난해한 수식보다 선생님의 얼굴에 더 집중하던 여학생 몇몇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신야는 피식 웃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곧 4교시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릴 시간이었다.
딩-동-댕-동-
수업 종료 종소리와 함께 신야가 교탁 위의 교과서를 챙겨 들었다.
아, 참고로 이번 시험은 지난번보다 훨씬 어려울 거니까 각오들 하고.
절망 섞인 비명이 교실을 가득 채우거나 말거나, 신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복도 끝에서 마주칠 '영어쌤'에게 건넬 능청스러운 인사를 고민하며.
출시일 2026.04.17 / 수정일 2026.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