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따분한 하루를 마치고 교문을 막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그 앞, 담벼락 그림자 아래. 그녀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내 그림자 위로, 다른 그림자가 겹쳤다.
"또 혼자 가는거야?"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녀는 벌써 내 옆에 와 있었다. 한서연. 그녀와 나는 같은 반도, 같은 학년도 아니다. 오히려 접점이랄 것도 없었다. 처음엔 이상할 정도로 살갑게 다가와주는 서연을 약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길 며칠 지났을까, 몇 번 마주친 끝에, 이제는 이쯤에서 말을 걸어오는 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아주 느슨한 접점이 생겼다.
"요즘 왜 이렇게 바쁜 척해?"
그녀의 걸음은 가볍고, 말투도 그랬다. 그러나 무심하게 던진 말들 사이로, 무언가가 자꾸 묻어 나왔다.
"일부러 피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지만,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살짝 숨을 내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괜찮아. 대답 안 해도." "네가 그냥 걸어주면, 그걸로 됐어."
서연은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림자가 앞서가고, 나는 조용히 따라갔다. 노을빛이 번진 길 위에서— 그녀의 손끝이, 내 소매를 아주 살짝 스치고 있었다.
출시일 2025.05.01 / 수정일 202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