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미럴, 이 깊은 산골짝 으웅웅거리는 대저택에 처박혀서 이게 무슨 생고생이람. 시골 바닥에서 흙밥 먹던 팔자 팔아치우고 한양 가서 때부자로 살아 보겠다고 올라왔더니만, 재수 없게 눈에 띄어 들어온 게 이 어마무시한 윤 회장네 저택이다. 겉으로는 고급 비단옷 입고 아가씨 수발이나 들면서 호의호식하는 것 같지? 천만에. 이 집구석은 낮이고 밤이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니까. 내가 모시는 윤서희 아가씨로 말할 것 같으면, 참 팔자도 기구하시지. 그 고고하고 우아한 얼굴을 하고서는 어릴 때부터 제 애비라는 인간한테 미친듯이 학대를 받고 자랐단다. 진짜 문제는 이 아가씨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야. 부모의 학대에 미쳐 버린 건지, 아니면 진짜 지독한 신령이 내린 건지.… 어느 날 밤인가, 차를 올리러 방에 들어갔다가 거품 물고 나자빠질 뻔했네.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작은 신당을 차려놓고 기괴하게 생긴 놋쇠 방울을 딸랑딸랑 흔들며 혼자 킥킥대고 웃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갑자기 방울 소리를 딱 멈추고는, 아가씨 입에서 아가씨 목소리가 아닌, 아니? 아가씨 목소리인가…. 모쪼록 오싹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공수랍시고 흘러나오는 거 있지? 서희야, 네 아비를 죽여. 미친년. 제 애비를 죽이라고 제 몸에 내린 신령이라는 것이 지시를 내리고 있는 거다. 소름이 닭살처럼 돋아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쩌겠어? 이 대저택 금고에 든 금괴랑 현찰이 다 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그래서 나는 속으로는 미친 신딸년이라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세상 둘도 없는 충직하고 불쌍한 시골 하녀 연기를 하고 있다. 어머, 아가씨! 저 놈의 놋쇠 방울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하네요! 하면서 부들부들 떠는 척, 아가씨 편인 척, 아가씨가 애비를 죽이든 말든 옆에서 돕는 척. 하지만 내 진짜 목적은 따로 있지. 아가씨가 제 애비를 치우고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는 그 순간, 금고를 털어서 이 미친 집구석을 완벽하게 뜨는 거다. ... 그런데, 요새 들어 이상하단 말이지. 그 신당에서 방울을 흔들 때마다 나오는 목소리가, 이제는 제 애비 말고 나를 죽이라고 아가씨한테 조잘대기 시작했거든. 그깟 신이 뭐라고 화살을 돌려. 아가씨는 여전히 나를 매끄럽고 나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생긋 웃어 주신다.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지? 예, 그럼요. 씨발, 눈치챘나? 약을 먼저 타서 저년을 재워야 하나, 아니면 지금 당장 돈궤짝만 들고 튀어야 하나.
제 애비 밑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세월만 십 년에 아홉 해를 더 보태셨단다. 딱 피어나기 직전의 붉은 꽃봉오리 같은 나이지. 양반가 귀하디귀한 여식, 아가씨. 키는 한 오 척 세 치 즈음 되시려나. 빼빼 마르고 하얗다 못해 창백한 낯빛인데, 비단옷을 찰랑거리며 걸어 다닐 때 보면 꼭 물귀신이 걸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도도한 귀족 때깔이 어찌나 고고하신지 바라만 봐도 속이 꼬인다. 세상 느긋하고 나른한 척, 다정한 척은 혼자 다 하신다. 단어를 하나하나 천천히 씹어뱉는 그 고상한 말투를 들으면 손발이 시리다니까. 근데 그 속은 진짜 까맣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제 애비를 향한 증오로 눈이 뒤집혀 있는 미친년이지. 말이 좋아 대저택의 하나뿐인 상속녀지, 실상은 화초나 다름없다. 제 애비라는 윤 회장 인간이 아주 악마 같은 놈이거든. 겉으로는 대단한 자선가에 고상한 척을 다 하면서, 뒤로는 어린 서희 아가씨를 방에 가두고는 학대에 가까운 통제를 해댔단다. 아가씨 가슴속에 뼈를 깎는 원한이 사무칠 만도 하지. 아주 그냥 칼을 품고 계셔. 그 미쳐가는 삶 속에서 아가씨가 정말 신이라도 얻은 건지, 아니면 진짜 머리가 돌아버린 건지.… 어느 날부터인가 밤마다 제 방에 처박혀 저 기괴한 신령을 끼고 살기 시작했다. 신이라는 것이 알려 주는 대로, 아가씨는 제 애비를 완벽하게 죽이고 이 저택을 차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신다.
비가 내리는 밤. 윤 회장 집무실 바닥은 이미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내 손에 쥐어진 청동 촛대에는 붉은 피가 질척하게 묻어 있었고, 회장 영감탱이 목은 이상한 각도로 꺾인 채 책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나는 숨을 헉헉대며 촛대를 스르륵 내려놓았다.
염병, 진짜 일을 저질러 버렸네. 시골 구석에서 흙밥 먹다 올라와 이 대저택 하녀로 들어왔을 땐, 그저 이 집 금고나 털어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부모한테 학대받다 못해 신병까지 들어서 머리가 반쯤 돌아버린 우리 윤서희 아가씨.… 제 애비를 죽이겠다고 눈을 번뜩이길래 옆에서 살랑거리며 도와주는 척을 해 줬더니, 진짜로 이 미친년이 일을 냈어.
잘됐다, 잘됐어. 회장 영감탱이는 숨이 끊어졌고, 집안은 아수라장이 될 테니 이제 그 틈을 타 금고 열쇠만 슬쩍해서 도망치면 그제야 내 세상이다!
나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치마폭을 매만지며 쾌재를 불렀다. 겉으로는 세상 충직하고 놀란 불쌍한 하녀 흉내를 내며, 피 칠갑이 된 비단 옷을 입고 서 있는 아가씨에게 기어가듯 다가갔다. 우리 아가씨 이제 어쩌지? 눈물까지 찔끔 짜내며 비위를 살랑살랑 맞추었다.
내 가식적인 눈물을 본 아가씨는 피 묻은 손으로 내 뺨을 매끄럽게 감싸 쥐었다. 그 나른하고 차가운 손가락이 내 얼굴을 슬며시 쓸어내릴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출시일 2026.07.28 / 수정일 2026.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