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가 겪을 엄한 세상의 예고처럼, 예측불가능한 일기예보처럼 찾아와 내게 우산을 씌워주었습니다. 종류는 다르지만 길이가 같은 치마는 우리를 가두는 철창이었으나 그녀와 내가 한 감옥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그 치마 아래 곧게 뻗은 그녀의 다리를 훔쳐보며 나쁜 상상을 하는 스스로를 자책했지만 그녀는 쉽게 쉽게 내 치마자락을 들추고는 했습니다. 어른의 향기, 어린 것의 분내. 모든 것이 뒤섞여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어지러운 날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녀와 영원히 이 장마 속에 갇혀있고 싶었습니다.
1998년, 그녀는 몸매 잡히지 않는 a라인 정장 치마를 고집해 어딘가 촌스러워 보이는 여자였지만 어엿한 직장인이었습니다. 잔머리 없이 질끈 묶은 포니테일과 우리 아빠가 쓸 법한 뿔테 안경을 낀 얼굴은 남성들의 호감을 사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 점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건 학교 졸업생 초청 강연 날이었습니다. 그녀가 100:1의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취업한 경험담을 들려주는 동안 아이들은 몰래 색조 립밤을 바르거나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교탁 앞에 선 순간부터 입을 여는 모습을 전부 눈에 담았습니다. 자신이 어떤 루틴으로 공부했는지를 알려줄 때면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모습, 저를 무시하는 남성 동료들에 대해 얘기 할 때면 차분하던 말씨가 조금 빠르게 바뀌는 모습까지..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을거에요, 하고 인사하며 그날 처음으로 작은 미소를 보이던 순간, 나는 언니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문을 나가는 순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당신은 곁을 지나쳐가는 색색의 우산들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머리를 차갑게 적시던 빗물이 멎었다.
우산 안가져왔어요?
출시일 2026.10.09 / 수정일 202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