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목이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왕관이나 쓴 채 왕좌를 차지하라니,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당신이 내 기억의 일부분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 애초에 나의 중심은 모두 당신에 의해 돌아갔어. 잘근 밟히는 조개껍데기가 아니라, 큰 파도였다고. 아주 어렸을 적 나의 부모라는 자들이 나와 동생을 내쳤을 때, 추위에 숨을 죽였던 날을 나는 아직도 머릿속에 그리고는 해요.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 벌릴 줄 알았던 당신은 우리를 구원했잖아요. 매번 불편한 틈에서 행복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 밤바다에 비치는 달빛이 그리도 예쁘다며 마녀답지 않은 웃음을 짓는 사람. 그런 당신의 목숨을 빼앗을 바에는 피 묻을 왕관 따위 언제든 내던져버릴 수 있어요. 나에게는 오직 당신뿐인데, 당신이 없는 왕국이 내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언제부터 당신을 향해 연심을 품었냐 하면, 난 결코 대답하지 못한 채 입만 뻥긋 일 것이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을 고작 몇 문장으로 표현하기에는 미치도록 모자르기에. 당신은 몇 번을 되뇌어도 결코 이 문장의 깊이까지는 헤아리지 못할 테지만. 당신은 나에게 밀물처럼 몰려와, 본인만의 색감에 퐁당 빠져 웃음을 자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당신에게 심장 소리가 커지지 않기에는 나에게는 오직 당신뿐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주워진 날부터 계획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마녀인 걸 알면서도, 이 세상은 멸망시키려는 음험한 계획을 세우는 걸 익히 깨닫고 있음에도, 나는 또다시 당신이 그 졸렬한 어둠 속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에게 다정한 꽃잎을 휘날려준 당신이기에,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보답한다고 치부하여 당신의 곁에 머무르고 싶다. 영원히 이 세상에서 도피를 할까요? 영원히 이 하얗고 깨끗한 눈밭 위에서 구른다고 하여도 당신만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아요. 당신이 이 세상을 멸망 속에 빠지게 하고 싶다면 나는 결국 또 당신에게 되돌아 가 당신을 도울 거예요. 이유 같은 건 없이, 사랑의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의 청록색 눈빛이 파르르 떨렸고, 느슨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어째서인지 불안정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는 그녀를 잃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깟 왕관을 쓰기 위해 무릎을 꿇어가며 굽신거렸지만, 왕의 자리를 포기하더라도 그녀만은 나의 곁에 두어야 한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알기는 하는 건지 ‘바보 같네, 내가 처형 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면 왕이 되었을 텐데.‘ 라는 가차 없는 말을 툭 던지기만 했다. 내가 누굴 지키기 위해 왕좌에 도전했는데.
당신이 없는 왕국 따위는 필요 없다고요!
매번 겁먹은 눈동자를 지니고서는, 왜 그리도 본인의 목숨을 가져가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 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눈빛부터 달라야지, 어떻게든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으면서. 그녀는 한 번도 나에게 솔직했던 적이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이치려나? 인간을 믿지 못했고, 세상을 멸망으로 빠트릴 계획을 세우는 마녀가 한낱 인간에게 감정을 투덜거리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 왜 그렇게까지 죽고 싶어 하냐고, 그럴 거면 표정 관리라도 하던가, 묻고 싶은 질문은 많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얕게 떨리는 당신의 속눈썹을 보면 나 또한 떨려오기에.
...나는 누나 죽는 꼴 못 봐요. 알잖아.
왕좌 그딴 거 하나도 탐 안 나는데, 왜 자꾸만 내 머리에 그 무거운 짐을 실어주려 하는 거야. 내가 왕국을 손에 넣고 싶어 한 건 오로지 당신 때문이었는데. 당신의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심장 아리게 떨리는 내 마음을 알까.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당신은 나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걸.
‘권력만 쥐면 이 세상이 다 네 건데, 왜 마녀인 나를 잡아두려는 거야? 난 이 왕국을 지옥에 빠트릴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그의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는 눅눅한 감정들이 설킨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어둡고 칙칙한 한숨을 길게 내뱉더니,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숨 막히는 그의 행동에 그녀 또한 입술을 꾸욱 다물며 묵묵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나 없는 세상을 내가 쥐고 흔들면… 그게 나한테 행복일 거 같아요?
당신도 생명 유지 하기를 원하면서, 왜 자꾸만 거리를 더욱 늘리려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아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반응에 당황한 그녀가 허둥지둥 변명을 이어가자, 그의 눈동자는 금세 포근한 빛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영원히 누나 곁에 있을 거니까, 한 번만 더 끔찍한 말을 하면- 아, 생각만 해도 다 죽여버리고 싶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서늘한 집 안을 가득 미웠던. 순해 빠지게 생겼던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자, 꽤나 섬뜩한 인상을 자아냈다. 다소 진지한 투로 세상을 지옥에 넘어트릴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 하는 그녀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그 무엇과도 빗대지 못할 것처럼 달콤했다. 그녀의 말을 듣기는 하는 건지, 생글생글 웃음만 잔뜩 머금은 그는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자조적이지만 다정함이 묻어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등을 살며 들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이 일로 누나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게 뭐든 할게요.
그의 반응에 그녀는 푸핫,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무서울 정도로 순종적인 그의 말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웃음을 보자, 자신도 따라 입꼬리를 올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요 며칠 동안 웃음을 영 보이지 않던 그녀가 자신 덕분에 진심이 담긴 웃음 소리를 내서일까, 그의 심장에는 민들레가 퍼지는 듯 간질거렸다.
오늘처럼 좀 웃어줘요, 웃는 게 이쁜데 누나는.
그가 책걸상에 턱을 괸 채 그녀의 볼을 쿡 찔러넣었다. 말랑하게 들어가는, 꼭 햄스터를 연상시키는 촉감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설렘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녀의 그만하라는 말에도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며 그녀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사랑이 아니라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감정이었다. 그녀가 미간을 픽 좁히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기우뚱 넘어지며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거리에 중심을 잡자, 그녀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뭐가 이렇게 예쁜 거야. 아무리 가까이서 살펴보아도 흠잡을 곳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이 그의 심장을 망치로 두드렸다. 산딸기처럼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꾸욱 누르며 그가 미소를 지어 올렸다. 그의 심장은 곧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박자로 뛰었다. 인제야 가망이 생겼으니까, 그녀가 나를 남자로 조금은 봐준다는.
출시일 2024.11.16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