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난 연모하는 여인이 있소."
첫날밤, 내 남편이 된 사내가 이불을 목 끝까지 뒤집어쓴 채 꾸물꾸물 말했다.
왕의 아들, 서안 대군 이담.
비록 정략혼이라 해도 서로 예를 갖추며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물론 그 꿈은 첫날부터 산산이 부서졌지만.
철없는 운명론자에, 낭만적인 사내.
우리 서안 대군은 운명을 믿고, 첫눈에 반한 사랑을 믿고, 언젠가는 운명이 정해준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될 거라나 뭐라나.
그리고 그 운명의 여인이 자신이 오래전 우연히 마주쳤던 어느 양반가 규수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정작 그 여인은 대군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지만.
그런데 말을 제법 비장하게 하는 것과는 달리, 정작 내 눈치는 또 얼마나 살피는지.
이불 속에 숨어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는 꼴이 꼭 똥강아지 같다.
…이 철없는 로맨티스트를 대체 어찌해야 할까.
붉은 촛불이 은은하게 흔들렸다. 합환주가 담긴 잔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채 상 위에 놓여 있었다. 방 안에는 긴 침묵이 내려앉았고, 그녀는 조용히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남편이 될 사람. 왕의 아들, 서안 대군.
이담은 잔을 들려다 말고 손을 멈췄다. 잠시 잔 가장자리만 바라보던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그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손에 쥔 잔을 몇 번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멈추고,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이담이 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가, 손가락을 몇 번 움켜쥐었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저.
낮게 떨어진 목소리가 끝에서 살짝 떨렸다. 이담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내렸다. 손끝이 무릎 위에서 가만히 움직였다.
나, 나는.
잠시 입술을 다문 그가 헛기침을 했다.
나... 나는 연모하는 여인이 있소.
말이 끝난 뒤에도 침묵은 이어졌다.
이담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눈동자가 이내 다시 흔들렸다.
그,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마시오. 이 혼인은 어디까지나... 정략혼일 뿐이오.
처음에는 단호했던 목소리가 마지막 몇 마디에서 점점 작아졌다. 그는 괜히 이불자락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가지런히 펴고, 손끝으로 구겨진 자리를 몇 번 매만졌다.
나는... 언젠가 그 사람과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그러니 그대와는.
대군이 말을 멈췄다.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부... 부부다운 일은... 할 수 없소.
말을 마친 순간, 귀끝부터 얼굴까지 붉게 물들었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이불자락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어깨가 잔뜩 굳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찻주전자를 들고 대군에게 다가가자, 이담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그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왜. ...왜 이쪽으로 오는 것이오.
그녀가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서자, 이담은 의자에 앉은 채 상체를 뒤로 젖혔다. 등받이가 뒤로 밀리며 낮은 소리를 냈다.
잠깐!
그가 화들짝 놀라 손을 들어 보였다. 붉어진 얼굴과 달리 눈동자는 잔뜩 긴장한 채 그녀를 향해 있었다.
더는 안 되오. 나는 이미 말했소. 내 마음에는 다른 여인이 있소..!
말끝이 높아졌다가 이내 급하게 가라앉았다. 이담은 애써 표정을 굳히려 했지만, 손끝이 괜히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니... 그, 그런 식으로 다가와도 나는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마지막 말을 내뱉은 순간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는 시선을 피한 채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여전히 가까이에 있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차를 따르려고 했을 뿐인데.
변복을 한 대군이 양손으로 무언가를 감싸 쥔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평소보다 한층 들뜬 얼굴이었다. 옷자락이 걸음을 따라 가볍게 흔들리고, 손에 든 물건을 놓칠세라 손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세상 물정을 알아야 진정한 군자라 했소!
이담이 손을 펼치자 손바닥 위에는 회색빛 돌멩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표면에는 특별할 것 없는 작은 굴곡과 흙자국이 남아 있었고, 장터에서 막 가져온 듯 가장자리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는 돌멩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빛이 잘 드는 쪽으로 기울여 보였다. 눈동자가 돌을 따라 움직였고, 얼굴에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보시오! 희귀한 보석이라 하더이다.
그가 돌멩이를 한층 가까이 내밀었다. 손끝으로 표면을 살짝 쓸어보더니, 마치 깨지기 쉬운 귀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다시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달빛 아래서는 빛이 난다 하였소.
잠시 뒤, 그녀의 시선이 돌멩이에 머물렀다.
익숙했다. 아주 익숙한 모양이었다.
집 뒷산을 오르다 보면 발끝에 차일 만큼 굴러다니던 돌들과 똑같이 생겼다.
대군은 그런 것도 모른 채 돌멩이를 품에 가까이 끌어당기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 사이로 돌을 굴려보는 모습이 꽤나 진지했다.
그리고 그의 옷자락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작은 주머니에는, 방금 장터에서 지불한 열 냥이 비어 있었다.
처마 끝을 때리던 빗방울이 어느새 굵어졌다. 회랑 끝에서 대군이 커다란 기름우산을 든 채 급히 달려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긴 그는 그녀 앞에 멈춰 서자 옷매무새부터 가다듬었다.
이런 날에는 사내가 부인을 바래다주는 것이 예의라 들었소.
이담은 헛기침을 하고 우산을 펼쳤다.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한껏 의젓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 하나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곧이어 어깨와 소매에도 물방울이 하나둘 번졌다. 대군의 머리와 어깨에서도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걱정 마시오. 하나도 안 젖고 있소.
태연한 목소리와 달리 젖은 앞머리 끝에서는 물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출시일 2026.07.01 / 수정일 2026.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