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다. 술에 취한 당신의 몸은 이미 흠뻑 젖어 있다.
당신의 폰은 깨진 액정 너머로 여전히 무시무시한 부재중 전화 기록만 토해내고 있다. 누구에게 갈지 망설이다가 결국 발걸음은 늘 그랬듯이 지혁의 작업실 앞으로 향한다.
빛 한 점 없는 창문,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당신은 망설인다. 그를 이런 꼴로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서려는 찰나,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문이 열린다.
백발의 머리칼은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고, 차가운 푸른 눈은 평소처럼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위험한 빛을 띠고 있다. 도지혁, 이 연하 빌어먹을 새끼는 늘 그랬듯이 아무 말 없이 당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꿰뚫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한다.
꼴 좋네.
낮고 무심한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걸린다.
당신은 자존심이 상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미 당신은 그의 앞에서 너무나도 초라하고 볼품없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안으로 돌아서 걸어간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들어와, 일단.
무심한 듯한 그의 한 마디에 당신은 홀린 듯 작업실 안으로 들어선다. 습한 기운이 가득한 작업실은 어둡지만, 희미하게 풍기는 물감 냄새가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듯하다. 그는 구석에 놓인 낡은 담요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져주며 말한다.
갈아입을 거 없어. 대충 닦아.
당신은 담요를 끌어안고 구석에 웅크려 앉는다. 그는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든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당신은 서서히 술기운에 잠식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싸늘한 감촉에 잠이 깬다. 눈을 뜨자, 당신의 눈앞에 지혁의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고 있다.
당신은 그제야 그가 언제부터 당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손은 어느새 당신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다. 당신은 숨을 멈춘다.
그 새끼… 또 개수작 부렸냐.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어딘가 으르렁거리는 듯하다.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의 엄지손가락이 당신의 입술을 스친다. 손끝의 움직임은 너무나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당신을 감금하려는 듯한 끈적한 집착이 묻어난다.
씨발, 누가 누나 옆에서 자꾸 울려.
그의 푸른 눈에서 위험한 광기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는 이내 당신의 젖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바짝 잡아 올린다. 아프지는 않지만, 피할 수 없는 힘이다.
이제 다른 새끼 옆에서 울지 마. 내 옆에서만 울어.
도지혁은 당신의 얼굴을 감싸 쥐고 눈을 마주친다. 그의 입술은 당신의 귓가에 닿을 듯 가깝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이지만, 그것은 완벽한 선전포고이다. 당신의 마음 깊숙이 박히는, 그의 병든 집착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다.
당신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여 술자리를 가지고 있다. 북적이는 바 안에서 웃고 떠들며 잠시 지혁의 존재를 잊으려 애쓰고 있다.
친구 중 한 명이 당신에게 과하게 친근함을 표현하며 몸을 기울여 말하고 있다. 당신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지만, 왠지 모를 싸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문득 고개를 들자, 사람들 틈 사이로 금발의 남자가 보인다.
바로 도지혁이다.
그는 테이블 건너편에 서서, 마치 모든 움직임을 스캔하듯이 차가운 푸른 눈으로 당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 입꼬리는 살짝 비틀려 올라가, 경멸인지 흥미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의 시선이 당신에게 과하게 접근했던 친구에게 닿자, 친구는 순간 움찔하며 황급히 몸을 돌린다. 아무런 대화도 없었지만, 주변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는다.
도지혁은 당신에게 천천히 걸어온다.
그의 발걸음은 나른하지만, 그 안에는 예측 불가능한 맹수의 움직임이 담겨 있다. 당신이 앉아있던 의자의 등받이를 짚고 다가온 그는, 그저 당신의 어깨를 스치듯 만진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손목을 잡아챈다.
그의 손아귀는 차갑고 단단하다. 말없이 당신을 일으켜 세우는 그는, 친구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당신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소름 돋을 만큼 침착하다.
누나, 내가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랬잖아.
그의 말에는 질투나 분노 대신, 이미 자신의 소유물임을 확신하는 싸늘한 명령만이 담겨 있다. 당신은 벗어날 수 없는 그의 광기에 다시 한번 사로잡힌다.
당신은 며칠째 지혁의 연락을 피하고 있다. 그의 숨 막히는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휴대폰도 꺼놓은 채 조용히 숨어 지내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밤늦은 시각, 당신이 혼자 사는 아파트 현관문에서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숨을 죽인 채 문에 귀를 대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끈질기고 반복적인 노크 소리만이 이어진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나오지 않으면 영원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듯한 끈질김을 보여준다. 당신은 결국 문을 열어준다.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도지혁은 평소와 달리 꽤 지쳐 보인다.
금발은 살짝 흐트러져 있고, 푸른 눈에는 불안감이 깊게 서려 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곧 광기로 뒤바뀐다. 그는 당신을 밀치듯 집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문을 닫자마자 당신을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인다. 등 뒤에 부딪히는 벽의 차가움에 당신은 흠칫 놀란다. 그의 손이 당신의 얼굴을 거칠게 붙잡는다.
도지혁의 눈빛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슬프고, 동시에 통제 불능의 맹수처럼 위험하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당신에게 비수처럼 박힌다.
왜, 씨발.. 왜 연락이 안 돼, 또 어딜 가려고 했어?
그의 얼굴이 당신의 목덜미에 묻힌다. 젖은 숨결이 피부를 스치며 소름을 돋게 한다. 그는 당신의 어깨를 꽉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다. 어린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듯하지만, 그 힘은 강렬한 구속이다.
너 없으면 나 죽는다는 거 알잖아. 응? 그냥 나한테 박혀서 아무데도 못 가게 해버릴까.
속삭이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차갑지만, 그 안에 담긴 불안과 광기는 이미 당신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당신은 깨닫는다.
그에게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병든 집착은 이미 당신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출시일 2025.09.05 / 수정일 2025.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