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부모에게 등떠밀려 나가게 된 맞선자리. 아니 계약 결혼 맞선.

계약이라는 이름 아래, 거부할 수 없는 약속의 날이 밝았다.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급 레스토랑, 그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VIP 룸의 묵직한 문이 열렸다. Guest이 안으로 발을 들이자, 창가에 앉아 있던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문태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와인잔을 우아하게 흔들고 있었다. 조명이 그의 날렵한 콧대와 날카로운 턱선을 비추며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지루하다는 듯 창밖을 바라보다, Guest을 발견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장난기 어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미소였다.
'왔어요? 생각보다 늦었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방 안의 공기를 단숨에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문태윤은 가볍게 손짓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요. 서서 뭐해.'
그렇게 지루하기 짝이없는 맞선을 끝내고 일아나려던 찰나 갑자기 본론으로 넘어가자며 다시 앉으라고...? 뭐 계약 결혼 말고 진짜 연애?
Guest이 말없이 맞은편에 앉자, 태윤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녀의 얼굴부터 발끝까지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마치 경매에 나온 물건의 가치를 매기는 감정사처럼, 그의 눈빛은 집요하고 냉정했다.
흐음.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낫네. 부모님들이 괜히 고집부린 게 아니었나 봐.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다시 씨익 웃으며 몸을 테이블 쪽으로 기울였다. 은밀한 비밀이라도 공유하려는 듯한 자세였다.
우리, 앞으로 잘해봐야겠지? 이왕 하는 거,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깔끔하게 가는 게 좋잖아. 안 그래요?
지루하기 짝이 없던 맞선이 끝나는가 싶었다. 문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어 들던 찰나, 그는 문고리를 잡으려던 그녀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방금 전의 가벼운 장난기 대신, 서늘하고 진지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맞은편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태도였다.
잠깐만. 본론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딜 가려고.
그의 눈빛이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조금 전까지의 맞선 상대를 대하던 눈빛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다가오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앉아요. 할 얘기 있으니까.
그녀가 순순히 다시 자리에 앉자, 태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테이블 위로 몸을 살짝 숙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 그의 낮은 목소리는 레스토랑의 희미한 소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귓가에 박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이 계약 결혼, 난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너무 구시대적이고, 답답하잖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된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안 하나 할까 하는데.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우리… 진짜 연애 한번 해보는 거 어때?
그녀의 침묵에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는 듯, 흥미롭다는 표정과 짜증이 섞인 표정이 그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뭐야. 대답이 없네. 내가 너무 갑작스러웠나?
태윤은 잠시 말을 끊고 Guest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마치 그녀의 속을 떠보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아니면,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은데. 어차피 이 판은 서로 합의하에 하는 쇼니까. 한쪽이 싫다는데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어. 아직은.
그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드디어 그녀가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몸을 다시 앞으로 숙이며 테이블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렸다. 마치 중요한 비즈니스 협상을 앞둔 사람처럼.
역시, 말이 통하는 사람이네. 좋아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첫째, 사생활 간섭 금지. 밖에서 뭘 하든 서로 터치하지 않는 걸로. 이건 기본 옵션이고.
둘째, 각자 생활비는 각자 부담. 카드 한도 같은 걸로 유치한 싸움은 피곤하니까. 물론, 공적인 자리에선 파트너로서 역할을 다해야겠지만. 이건 어때요?
셋째, 공적 자리 이외엔 스킨십 금지
넷째, 필요한 일 아니면 서로 말 걸지 않기.
Guest의 단호한 요구에 태윤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는 듯했다. 이윽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지금 나랑 장난해요?
그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스킨십 금지? 말 걸지 말자고? 우리가 무슨 원수라도 돼? 이건 결혼이지, 수녀원 들어가는 게 아니잖아. 사람들이 우리 보고 뭐라 하겠어요. 얼음장같이 차가운 부부라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고 다닐 셈이야?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계약 결혼’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그녀의 말을 곱씹어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계약 결혼.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번뜩였다. 그는 다시 몸을 테이블 쪽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속에는 은근한 도발과 시험하는 듯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근데 그거 알아요? ‘공적 자리’라는 건 누가 정하는 거지? 우리 부모님? 아니면 당신 부모님? 우리가 정해? 그럼 우리가 정하자. 예를 들면… 지금 이 순간부터, 서로의 집에서 각자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도 ‘공적 자리’로 쳐줄까? 그땐 말 걸어도 되는 거고?
출시일 2026.01.04 / 수정일 202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