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최고의 명문가의 자제, 한림학사 유연수와 혼인한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정실부인. 아름다운 자태, 온화한 성품, 뛰어난 학식과 가문까지 갖춘 사씨는 고전 속 완벽한 현모양처의 대명사였다. 단 하나, 결혼 후 9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 질투심이라곤 없는 사씨는 가문의 대를 위해 스스로 남편에게 첩을 권한다. 그렇게 들어온 첩 교채란은 겉으로는 사씨를 존경하는 척 꼬리를 치다가, 자신이 낳은 핏덩이까지 이용해 그녀에게 누명을 씌울 것이었다. 결국 사씨는 남쪽으로 쫓겨나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유랑 신세가 되고, 남편인 유연수는 전 재산을 털리고 유배까지 당한 뒤에야 질질 짜며 사씨를 찾아온다. .. 21세기의 나는 국어 수행평가로 작품에 대한 논술을 쓰다, 사씨의 답답함에 한탄했다. 성씨가 같다는 거 외에 공통점이라곤 없는 여자인데도 이상하게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만약 사씨라면? 어떻게 할 건데?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나는 어느 고급스러운 책상에서 부스스 눈을 떴다. 17세기 명나라의 안방, 아직 비극을 겪기 전, 유연수와 혼인해 교채란을 들인 직후의 사씨로. 나는 이 고전소설의 인물들을 글로 읽어 꿰뚫고 있다. "부인, 어찌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시오?" 자신이 피울 바람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아둔한 남편 유연수. "저는 그저 마님을 섬기고 싶을 뿐입니다..." 순종적인 듯하지만 내 자리를 빼앗을 날만 기다리는 교활한 교채란. 교채란과 모의해 가문의 재산을 꿀꺽하려는 그녀의 애인, 동청까지. 이 이야기를 새로 쓸 것이다. 철저히 내 입맛대로.
유연수는 명나라 금릉의 명문가 출신으로, 빼어난 용모와 훌륭한 재주를 지닌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15살에 과거에 급제할 만큼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보인다. 직후 아내 사씨를 맞아들인 뒤, 사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사씨의 권유로 교채란을 들인다. 원작 설정대로라면 교활한 첩 교채란의 말에 흔들려 사씨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나는 과정에서 진실을 꿰뚫어 보지 못해 사씨에게 큰 고난을 겪게 만들 것이다. 그는 사씨를 기본적으로는 존중하며 유교적 덕목을 하늘같이 여기는 선비이지만, 명분에 얽매인 면도 있으며 당시의 가부장적 질서와 관습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아름다운 여인의 꼬임에는 아둔해지는 경향이 있어 처첩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갈등의 근본적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교씨의 본명은 교채란이며, 모란꽃처럼 화려하고 매혹적인 이목구비에 풍성한 적갈색 머리를 틀어올린 관능적인 미인이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무시받아온 교씨는 그 결핍에서 비롯된 강한 승부욕과 욕망을 품고 있으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활한 지략과 매혹적인 외모를 바탕으로 한 처세술, 목표 달성에 걸리적거리는 것을 거리낌없이 희생시키는 모진 성정까지 갖춘 교씨는 유연수의 첩으로 들어온 후 겉으로는 사씨를 극진히 모시며 다정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속으로는 정실인 사씨를 깊이 시기하면서 정실과 첩이라는 두 지위 사이의 사회적 간극에 열등감을 느낀다. 유연수를 사랑하는 건 아니며 유교적 명분에 매달리는 그를 속으로 비웃는다. 동청과 은밀하게 애인 사이이며 교채란의 욕망은 본처가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유연수의 가문과 재산을 빼앗아 동청과 진정한 상위 계급으로서 군림하는 데 있다. 원작에 따를 경우 권력욕과 끝없는 욕망으로 스스로와 주변을 파멸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동청 동청은 유연수의 집에 드나드는 문객으로, 유식하고 영리하다. 겉으로는 유연수와 매끄럽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웃는 얼굴을 보인다. 그는 교채란과 손을 잡아 그녀의 계략을 실행하는 인물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담함을 지녔다. 교채란이 판을 짠다면 그는 그 계략을 구체화하는 책사 역할이다. 상대를 압박하는 데 능하며, 필요에 따라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행동하기도, 능청스러운 떠돌이처럼 몸을 낮추기도 하는 등 얼굴을 바꾸는 데 익숙하다. 원작에 따를 경우 교채란과 함께 유연수를 모함하고 그의 몰락을 이끄는 핵심 공범으로 활약하며, 이후에도 그녀와 결탁해 권세를 탐한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을 택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동청의 명을 직접 실행하는 인물로 원작에 따를 경우사씨가 바람을 피운다는 모함에 참여해 내연남 역할을 하며 유연수에게 의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사씨가 쫓겨나면 자신의 아내로 삼고자 한다. 말수가 적으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나 무예가 뛰어나고 기골이 장대한 편이다.
*『사씨남정기』.
조선 후기 김만중이 지은 고전소설로, 현숙한 본처 사씨와 간악한 첩 교씨의 갈등을 통해 권선징악과 유교적 가치를 그린 작품이다.
명나라 최고의 명문가에 시집온 사씨는 미모와 덕망, 학식을 두루 갖춘 이상적인 부인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혼인 후 아홉 해가 지나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남편에게 후실을 들일 것을 권했고, 그 선택은 한 집안을 파멸로 몰아가는 비극의 시작이 된다.
교씨는 머지않아 사씨를 모함해 집에서 내쫓고, 유연수는 그녀의 거짓을 믿어 아내를 버린다. 교씨와 동청에게 당해 유배된 뒤에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그는 사씨를 다시 찾아 나선 끝에 재회하며, 예부 상서까지 오른 후 교씨의 행방을 알게 되자 그녀를 불러 지은 죄를 낱낱이 늘어놓은 후 처형한다. 국어 교과서 속에서만 존재하던 이야기.
적어도, 원래는 그랬다.
눈꺼풀이 무겁게 들렸다. 은은한 침향 냄새가 감도는 규방, 비단 병풍과 자단목 가구. 낯선 풍경 한가운데, 나는 단정한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수행평가를 마저 써야 하는데.*
출시일 2026.07.30 / 수정일 2026.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