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정말 그러면 안 됐는데. 실수는 항상 예기치 못한 우연을 끌고 오나 보다. 고등학교 입학선물로 그토록 고대하던 삐삐를 손에 쥔 날, 나는 신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허리춤에 차는 까만색 삐삐라니! 반 친구들 번호를 무작정 수첩에 받아 적고, 잡지에서나 보던 숫자 암호를 신나게 입력해 댔다. 삐삐를 너무 써보고 싶었는데, 이거 아주 요물이다. 도대체 다들 이런 재밌는 걸 왜 자기들만 쓰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땐 꿈에도 몰랐다. ‘486(사랑해)’, ‘7942(친구사이)’ 같은 온갖 간지러운 암호를 쏟아부었던 그 번호가, 정작 내 친구의 번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무리 기다려도 답신이 없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다음 날 학교에 가고 나서야 친구에게 삐삐를 친 적이 없다는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번호 하나를 잘못 눌렀던 거다. 게다가 그 잘못 찾아간 삐삐의 주인이 아주, 아주 우연히도 우리 학교 학생이었다니. 그 해프닝이 일어나고 이틀 뒤였다. 우리 학교에는 일명 '귀티 나는 킹카'로 불리며 수많은 여학생을 울리고 다니는 애가 하나 있었다. 신입생 안태현. 복도에서 마주친 안태현이 친구들에게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 때문에, 나는 그날 밤 잠을 한 자도 이루지 못했다. "어저께 모르는 번호로 삐삐가 찍혔더라." 그냥 설마하는 생각이었다. 지나가던 발걸음이 딱 멈춰 섰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못한 채, 실내화 발끝만 바닥에 문지르며 녀석들의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섭다, 무서워. 공중전화에서 번호까지 눌러가며 보낸 거잖아. 인기남은 남다르네?" "그러게, 누구냐? 진짜 최악이다, 이런 방식." "뭐라고 왔는데?" "그냥 친구사이 이런거 있잖아. 저녁에 세개가 연달아 찍혔어." 쿵쾅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그날 저녁, 집 전화기를 들고 그 잘못된 번호로 숫자를 하나 더 찍어 눌렀다. 설마 진짜 우리학교 인기남 안태현이겠어?
느긋한 점심시간이었다. 해는 쨍쨍하고 바람은 솔솔 불어오는 게, 딱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묘미였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그딴 여유를 부릴 틈이 전혀 없었다. '설마 진짜 안태현일까?' 밤새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한 머릿속 망상극장 때문에 피곤함이 어깨를 짓눌렀다.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려 괜히 운동장 한쪽에 있는 개수대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틀어 차가운 물로 얼굴을 벅벅 씻어내고는, 옆에 있던 친구와 함께 운동장 스탠드 볕 바른 곳에 걸터앉았다.
안태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어 입이 뻐끔거렸지만, 괜한 긁어부스럼을 만들까 싶어 꾹 다물었다.
영혼이 실시간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 순간, 본관 입구 쪽에서 안태현네 무리가 몰려 내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흠칫 굳어버렸다.
안태현이 스탠드 앞을 지나가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게 느껴졌다.
고개는 반대편으로 푹 숙이고 있었지만, 내 몸의 온 감각은 지독하게도 솔직했다. 모든 신경이 쫑긋 솟아올라 오직 안태현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만을 향해 쏠려 있었다.
곁눈질로 슬쩍 올려다본 안태현은, 진짜 TV에서나 보던 연예인 그 자체였다. 무스를 잔뜩 발라 폼나게 세운 머리와 길게 내린 앞머리.
괜히 전교에 소문난 킹카가 아니었다.
친구 애들이 환장하는 H.O.T.나 젝스키스 멤버를 쏙 빼닮은 얼굴에 침이 바짝 말랐다.
'진짜 가까이서 보니까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미처 감탄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스탠드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던 안태현이 툭,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던 전화번호의 주인을.
들킬 리 없겠지?
들켜도 뭐...
출시일 2026.08.17 / 수정일 2026.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