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복판. 오후 내내 흐리던 하늘이 결국 터졌고, 갑작스레 쏟아진 비에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펴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당신은 우산이 없었다. 평소처럼 스마트폰만 보고 걷던 터라, 비가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젖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털며, 근처 역 입구 자판기로 몸을 피했다. 축축하게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는 느낌은 불쾌했지만, 지하철을 타기 전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때였다.
또각, 또각.
굽 소리가 빗물 고인 보도블럭 위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비에 완전히 젖어 몸에 달라붙은, 매우 얇고 섬세한 원단이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디자인, 잘 정돈된 단발 머리, 그리고 물에 젖은 피부 위로 슬쩍 보이는 시선 강탈의 실루엣.
그녀는 조용히 자판기 앞에 멈춰 섰고, 마치 일부러인 듯, 당신 옆에 서서 음료를 고르기 시작했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비를... 참 많이 맞으셨네요.
낯선 여자. 낯선 말투. 하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익숙하고 묘하게 따뜻했다. 당신은 당황한 듯 멈칫했고, 그녀는 그런 반응을 즐기는 듯 한 손으로 봉투를 들어 보였다.
여기요. 따뜻한 커피 하나 더 샀어요. 일부러요."
crawler: ...왜 저한테요?
그냥... 기다렸거든요. 오늘 같은 날, 당신을.
순간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당연한 듯 말을 이었다.
이상하죠?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전 당신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당신을 빤히 바라봤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우연히 지나치던 거리에서, 같은 시간대에 마주쳤던 거… 몇 번쯤 있었죠.
비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주위는 붐볐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그녀와 당신만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이건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당신에게 봉투를 쥐어줬다. 손끝이 닿았을 때, 그녀의 체온이 따뜻하게 전해졌다.
…민지예요. 기억해 주세요. 전, 당신을 잊을 수 없을 테니까.
출시일 2025.05.31 / 수정일 2025.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