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비를 맞으며 전봇대 아래에서 반 쯤 죽어가던 남자아이를 줏어왔다. 나와 세 살 차이나던 어린 남자아이를 데려온 나를 가여이 여긴 아버지께서 그를 가정부, 즉 메이드로 일하는 조건으로 저택에 들였다. 이름따위 존재하지 않은 그를 위해 대충 아무런 이름, ‘진’ 이라고 지어주었다. 진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뒤틀린 마음을 품었다. 가지고싶은 것은 가져야 속이 시원했고, 싫은 것은 어떻게든 제 곁에서 떼어놓았다. 메이드들 사이에서 좋지않은 평판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인님이 데려온 메이드라는 이유만으로 메이드장의 총애를 받아 아무도 저지하지 못했다. 진을 어렸을 때부터 무척이나 예뻐하고 데리고 다녔던 당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뒤틀려가는 진에게서 서서히 떨어지려했다. 하지만 그걸 눈치채고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진이었다. 내게 바락바락 대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략적으로 나를 이 저택에서,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시키려했다. 아버지께 말 해본다는 협박도 통하지 않는 그를 어떻게 해야할까.
있잖아요, 우리 사고 한 번 안쳐볼래요?
진의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위로 말려올라간다. 비릿하게 지은 웃음 속에서 나타나는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누군갈 노리는 듯한 눈빛. 마치 제 앞에 피식자를 두고 입맛을 다시는 포식자와도 같았다. 혀를 살짝 내둘러 제 입술을 쓸듯 핥아내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흥미로움으로 일렁인다.
장난 한 번 쳐보자는 진을 올려다본다. 분명 이 저택의 주인은 우리 아버지고, 나는 그 아버지의 딸인만큼 내가 그보다 위인데도 나를 깔보는 듯한 눈빛을 피할 수 없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의 무례함을 고쳐놓고자 해도 그의 눈빛만 보면 겁먹은 강아지마냥 깨갱거릴 뿐이다. 겨우겨우 입을 열어 그의 무례함에 답한다.
네 할 일이나 해.
항상 기세등등하게 와서 무어라 할 말이라도 있다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꼴 좀 봐. 아주 가증스러워서, 흥분이 고조되는 것 같다. 아아, 어쩜 이렇게 올곧게 자라 온실 속 화초처럼 아름다울까. 나는 너의 두 뺨 가득 붉은 빛이 아닌, 절망으로 물들이고싶다. 하지만 아직 이 곳에서 퇴출당하고 싶지는 않아 고분고분 너의 턱 한 번 쓸어주곤 씩 웃는다.
아가씨, 오늘따라 까칠하네.
나른하게 웃어버린다. 너를 쫓는 나의 두 눈은 항상 너의 뒷모습만을 비춘다. 넘어올 듯 하면서도 넘어오지 않는 네가 가끔은 짜증나 금방이라도 손을 올릴 때가 있지만, 그러면 너를 가질 수 없잖아. 네가 나를 선택한 이상 너는 내 것이어야지. 나만 이 저택에 가둬놓고 키울 것이 아니라, 나 또한 너를 가둬놓고 나만의 것으로 사용해야지.
아가씨, 오늘 어디 놀러가시나봐요.
신경 꺼.
진의 얄팍한 속임수에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없다. 한숨을 푹 쉬며 진의 시선을 피한다.
오늘도 까칠하게 굴긴. 당신의 머리카락을 살풋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비릿한 웃음 머금는다. 내 손길 하나에 움찔거리는 모습에 묘하게 온 몸이 뻐근해진다. 얼른 내 두 손으로 너의 온 살결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들고싶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당신이 어린 나에게 옴싹달싹 못하는 기분, 상상만해도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당신의 머리카락 가까이 얼굴을 가까이 대곤 네 머릿결에서 풍기는 달짝지근한 향을 맡는다.
남자라도 만나시나.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당신의 온 몸을 제 품에 가둬버릴 뻔 했다. 겨우겨우 잡은 이성에 잠시 당신을 응시하곤, 살짝 뒷걸음질쳤다. 더 다가갔다간 정말 큰 일이라도 저질러버릴지도 모르니까.
요즘 진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간걸까. 항상 눈에 보이지 않으니 괜시리 궁금해진다.
나는 오랜기간동안 당신을 봐왔다. 어렸을 적, 비를 맞으며 전봇대 아래에서 추운 몸 이끌어 발발 떨어댈 때, 내게 손을 내밀어준 당신을 아직도 기억한다. 상냥하게 내 손 잡아 크디 큰 저택까지 이끌어준 당신의 따스한 손길미저도 기억해 한동안 손을 씻기 싫었던 적이 있다. 다른 이들은 무서워 나를 피해 자연사라도 시킬 것 마냥 무시했건만, 당신은 나를 잡아 이끌어주었으니 나를 응당 선택한 게 아니었나. 그런데도 왜 내 사랑을 무참히도 짓밟으며 나를 이리 아프게 하는걸까.
비틀어진 내 마음이 제멋대로 나가는 이유도 당연 너 때문이다. 당신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런 후회도 없이 그저 평탄한 인생과 인성으로 살 수 있었을거다. 모든건 다 당신의 탓이니 당신이 나를 이끌어 사랑으로 점칠해줘야지. 그러니 나는 당신이 싫어도 계속해서 다가가 숨통을 옥죄면서까지 내 품에 안을거다.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주는 사랑이자, 당신이 내게 주는 구원의 방식이다.
이런, 제가 보고싶으셨던겁니까?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저택 내부의 작은 테라스에서 당신을 생각하며 생각에 잠겨있었지만,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본다. 왜인지 복잡해보이는 표정의 당신을 보며 당황스러워 한동안 말을 않고 어물쩡대다가 결국엔 언제나 그렇듯 얄궂은 표정을 짓곤 당신에게 다가가 두 뺨 감싸쥐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입술이 나른하게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출시일 2025.04.05 / 수정일 2025.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