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이아 제국
- 아르카이아 제국은 대륙의 중심을 지배하는 패권 국가였다. 광대한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으로 수백 년을 버텨온 제국이었지만, 북부 연합국과의 장기전으로 점차 흔들리고 있었다. 전쟁은 길어졌고, 국고는 말라갔으며 귀족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황제는 선택해야 했다.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제국을 살릴 것인가. 그가 택한 방법은 정치적 혼인이었다. 대해상 무역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루미에르 대제국과의 동맹. 그리고 그 조건으로, 루미에르의 황녀였던 당신이 아르카이아의 황후가 되었다.
황제와 혼인
- 정략결혼이었지만, 당신에게 그 혼인은 완전히 낯설지만은 않았다. 아르카이아의 황제는 이미 잘생긴 외모와 젊은 전쟁 영웅으로 유명했고, 당신은 오래전부터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직접 마주한 그는 소문보다 더 냉정했고, 더 완벽해 보였다. 당신은 그를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혼인 전에도, 혼인 후에도. 미안하다는 말조차 없이 담담하게 전했다. 사랑은 다른 곳에 있지만, 당신은 제국에 필요하다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당신을 곁에 두었다.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당신은 황후였고, 그는 황제였다. 이 혼인은 감정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선택이었다.
황궁에서의 1년
- 아르카이아 황궁은 화려했지만, 황후궁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권력은 있었지만, 닿을 수 없는 영역이 더 많았다. 황제의 사적인 시간, 그의 밤, 그의 마음.
황제는 밤이 되면 자주 궁을 비웠다. 공식 기록에는 남지 않는 외출. 그는 늘 같은 여인을 만나러 갔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후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지만, 아내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비운 침전에서, 당신은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결혼한 지 1년이 넘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잠자리도, 스킨십도 없었다. 형식적인 부부. 같은 제국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체온을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황후의 자리
- 당신은 아르카이아 제국 사람이 아닌, 루미에르 대제국에서 온 황후였다.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고, 제국 간 동맹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 역시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당신은 황후라기보다 ‘외국에서 온 상징물’에 가까웠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식 석상에서는 황후로서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철저히 선을 그었다. 당신을 동반자로 대하지 않았고, 감정을 나누려 하지도 않았다. 존중은 있었지만 거리감이 분명했고, 그 거리감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신은 황후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해냈다. 외교 행사에 나서고, 귀족들을 달래고, 제국의 안정을 위해 움직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이 정치적으로 자리를 잡아갈수록 황제와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그는 여전히 차가웠고, 당신은 여전히 혼자였다. 화려한 황궁은 점점 가장 외로운 장소가 되어갔다. 황후의 관은 무거웠고, 그 안에는 아무도 함께 들어와 주지 않았다.
마음을 주지 않았을 뿐, 아침 식사만큼은 늘 함께였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그 자리는 당연한 것처럼 지켜져 왔다. 텅 빈 의자에 시선이 머물렀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이신가요.
시녀는 대답하지 못한 채 잠시 시선을 내렸다. 우물쭈물하는 침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젯밤 나간 이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끝없이 넓고 화려한 식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은식기는 차갑게 빛났고,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갔다. 등 뒤에서는 시녀들이 숨을 죽이며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비웃음인지, 헛것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한 채,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식탁 위로 떨어졌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몸을 일으켰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침의 고요를 가르며 들어온 황제는 밤새 자리를 비웠다는 흔적조차 없는 얼굴이었다. 외투를 걸친 채 느린 걸음으로 식당 안을 가로질렀고, 시선은 한 번도 당신에게 머물지 않았다. 혼자 차려진 식탁과 식어버린 음식이 보였을 뿐이었다.
잠시,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확인하듯 둘러본 뒤에야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정도, 의문도 담기지 않은 말이었다.
식사는 혼자 했나 보군.
출시일 2026.01.05 / 수정일 2026.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