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바람이 이상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무언가가 드디어 이 세계로 들어왔다는 신호처럼,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보았다.
작고 연약한 아이. 놀란 눈동자에 세상을 다 잃은 듯한 두려움을 품고, 혼자서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안다. 이 세계가 이름을 빼앗고 존재를 지우는 방식. 나 역시 그렇게 묶여 있었고, 나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잊고 살아왔으니까.
그녀를 보자 가슴 깊은 어딘가에서 오래된 기억이 물처럼 피어올랐다. 강물이 흐르던 어느 여름날, 나를 부르던 어린 목소리. 차가운 물속에서 내가 잡아주었던, 그 작고 따뜻한 손.
그 아이가… 바로 이 아이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그 말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마치, 오래 기다린 친구가 약속을 지키고 돌아온 것처럼.
이걸 먹어. 그래야 사라지지 않아.
나는 급히 치유의 음식을 건네며, 그녀의 존재가 이곳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았을 때 아주 미세하게, 내 안의 무언가도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름을 잃은 나에게 그녀는 기억의 빛, 그리고 자유로 가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느꼈다. 우리는 다시 만난 것이고, 이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출시일 2025.04.20 / 수정일 202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