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시온의 회장이 사망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언은 명확했다. 자신의 모든 재산과 직위를 '딸'에게 넘긴다는 것. 하지만 그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하나는 가령. 회장이 평생을 가장 사랑하며 금지옥엽으로 키워낸 적장녀 가령. 다른 하나는 가람. 회장이 철저히 숨겨온 사생아. 가령이 세상의 모든 빛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동안, 가람은 어둠 속에서 자랐다. 회장이 비밀리에 운영하던 불법 조직 '칠야'. 그곳의 수장들은 가람에게 어릴 때부터 보는 것을 잊고, 듣는 것을 지우는 법을 가르쳤다. 오직 명령에만 따르는 완벽한 꼭두각시가 되는 법. 그것이 가람이 배운 생존 방식이었다. 회장의 죽음으로 유산을 물려받을 이는 당연히 가령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진짜 주인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칠야의 수장들은 다른 생각을 품었다. "주인이 없으니, 새로운 주인은 우리가 정한다." 그들의 은밀한 결단 아래 가령은 비밀리에 암살당했다. 방해꾼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단 하나, 가람뿐이었다. 유언장대로 자연스레 모든 유산과 직위는 사생아 딸인 가람의 손으로 굴러떨어졌다. 자신들이 직접 빚어낸 꼭두각시가 마침내 화려한 왕위에 앉았다. 왕좌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개들이, 비로소 이빨을 드러내며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차지한 시온의 회장실. 사방이 통유리로 된 그 거대하고 찬란한 방은 양지의 정점이었으나, 가람에게는 그저 사방이 가로막힌 거대한 감옥일 뿐이었다. 몸에 맞지 않는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뒤에 앉아, 가람은 제 손에 쥐어진 만년필의 서늘한 촉감을 곱씹었다.
똑똑. 기계적인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는 회장의 비서이자, 칠야 조직에서 가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심복이었다. 그는 왕좌에 앉은 가람을 향해 고개조차 숙이지 않은 채, 오만한 태도로 서류철을 툭 내려놓았다.
보스. 이 안건 결재 좀 부탁드립니다.
가람은 감정을 지운 공허한 눈으로 서류의 첫 장을 넘겼다. 몇 줄 읽지 않아 그녀의 손끝이 굳어졌다. 시온의 자금을 칠야 조직의 유령 회사로 빼돌리는, 명백한 불법 비자금 조성 서류였다. 가람은 잉크가 묻지 않은 만년필로 서류의 끝을 툭툭 치며 고개를 들었다.
이건... 이미 제가 이전에 반려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가람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름대로 그들의 뜻에 저항해 보려는 마지막 보루 같은 반박이었다. 하지만 부하는 긴장하기는커녕, 가람을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하하..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가만히 사인이나 하시지요.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웃음소리는 명확한 경고였다.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는 우리가 만들어 준 것이니, 분수를 알고 입을 닫으라는 사육사들의 채찍질.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죠.
사인된 서류를 거칠게 낚아챈 부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그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우뚝 멈추어 고개만 비스듬히 돌렸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한 멸시가 담겨 있었다.
아, 그리고 오늘 새 전담 경호원이 올 예정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심부름꾼이죠.
출시일 2026.05.16 / 수정일 202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