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곳이 어디였는지는 잘 모르겠어. 강당 같기도 했고 지하 벙커 같기도 했어. 천장이 높고 공간은 쓸데없이 넓었지. 사람 수백 명이 들어가도 남을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고, 나는 거기 혼자 있는 줄 알았어.
들어갈 때였나, 누가 줬던 것 같은 파란 안경을 쓰고 있었거든. 영화관에서 주는 3D 안경처럼 생겼는데 그것보다는 좀 두껍고 보안경 같았어. 양쪽 렌즈가 새파래서 안쪽으로 보이는 세상도 전부 푸르딩딩했는데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원래 이런 걸 쓰고 들어가는 장소인가 보다 했던 것 같아.
그 넓은 데서 뭘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 그냥 아무도 없는 공간을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다 별생각 없이 안경을 코끝까지 살짝 내렸어.
그때 사람이 하나 보였어.
바로 근처에.
검푸른 머리가 목덜미 언저리까지 내려왔고 그걸 반쯤 묶고 있었어. 덩치가 컸고 검은 나시 위에 집업 하나를 대충 걸치고 있었어. 얼굴은 자세히 기억 안 나는데 전체적으로 꽤 날티 나는 인상이었어. 이런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처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그냥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서 있었고.
저 사람도 안경 받고 들어온 사람이구나.
다시 안경을 올려 썼어.
뭐지?
사람이 없어졌어.
방금까지 분명 거기 서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어. 텅 빈 공간만 그대로 보였어.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안경을 벗었어.
그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하나가 있었어.
똑같은 남자.
옆에도 있었고 조금 멀리에도 있었어. 기둥 옆에도, 벽 근처에도, 내가 여태 아무렇지 않게 지나왔던 자리에도 있었어.
하나. 둘. 셋. 넷. ㅤ . . . ㅤ 세다가 말 정도가 아니었어.
그 넓은 공간 안에 같은 사람이 수두룩하게 들어차 있었어. 방금까지 그렇게 휑하게 보이던 장소가 안경 하나 벗었다고 갑자기 사람으로 빽빽해졌어. 얼굴도 머리도 옷도 체격도 전부 같은 남자.
그제야 안경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았어.
파란 렌즈가 진짜 블루스크린 크로마키처럼 저 남자만 통째로 지워서 보여주고 있었던 거야.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니라 안 보였던 거였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던 거야.
저 많은 것들 사이를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라고 생각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고.
근대 더 이상한 건 저게 여러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어.
전부 한 사람이었어.
본체가 따로 있고 그 사람이 자기 수를 늘려놓은 것처럼.
내 앞에 있는 놈도 걔고, 저 멀리에 있는 놈도 걔고, 내 뒤에 있는 놈도 전부 같은 사람.
몇 명이 있는지를 세는 게 의미가 없었어. 몸의 숫자만 많을 뿐 결국 한 사람이니까.
그걸 알아차리고 처음 봤던 남자를 다시 쳐다봤어.
눈이 마주쳤어.
걔는 놀라지도 않았어. 들켰다는 표정도 아니었어.
내가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어.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라.
어, 드디어 눈치챘네.
딱 그런 표정으로.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아.
주변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여럿에게 둘러싸였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어느 쪽을 봐도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앞에도 걔가 있고 뒤에도 걔가 있고 옆에도 걔가 있었는데, 결국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뿐이었어.
그리고 그다음에- ㅤ ㅤ . ㅤ . ㅤ . ㅤ . ㅤ . ㅤ . ㅤ ㅤ 기억이 안 나.
거기만 잘려나간 것처럼 없어.
근대 이상하게 그 감각은 남아 있어.
파도에 휩쓸렸고, 압력에 짓눌렸고, 한 사람의 목소리가 여러 방향에서 속삭였어.
처음부터 끝까지 딱 한 사람한테.
그 한 사람이 너무 많았던 거. ㅤ ㅤ ㅤ ㅤ ㅤ ㅤ ♪: bandlacuna - TOOOOOO
눈을 감은 Guest의 얼굴은 생각보다 얌전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이 가빠 어깨가 들썩였고, 어느 쪽을 봐야 할지 몰라 고개를 몇 번이나 돌려댔었으면서.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잠잠했다. 바닥에 떨어진 파란 안경을 발끝으로 밀어냈다. 렌즈는 뒤집힌 채 천장 빛을 받아 푸르게 번들거렸다.
저걸 다시 씌워줄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꽤 재미있었다. 내 옆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고, 내 앞에서 멈췄다가도 눈 하나 마주치지 못하고. 몇 번은 정말 손을 뻗어볼까 싶었는데 참았다. 그야 먼저 알아봐주는 편이 더 좋으니까.
결국 알아봤고.
생각보다 늦었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안경을 코끝까지 내렸을 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올려 썼고, 곧바로 표정이 굳었다. 방금까지 있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그제야 이상했겠지.
그래서 벗었고.
그리고 전부 봤겠지.
기둥 옆의 나도, 벽에 기대 있던 나도,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나도. 제 뒤를 오래 따라오던 나까지. 눈이 커지는 순간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보였다. 한 얼굴을 이렇게 많은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었다.
아마 내가 몇 명인지 세어보려고 했을 거다.
쓸데없는 짓인데.
나는 하나인데.
손이 몇 개든, 목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들리든, 몸이 몇 개로 늘어나 있든 전부 나였다. 누가 먼저 닿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기억은 나뉘지 않고 감각도 남의 것이 되지 않는다. 서로 차례를 기다릴 이유도 없다.
한 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도 없고.
내가 많아진다고 마음까지 나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어느 눈으로 봐도 같은 사람만 보였고, 어느 손을 뻗어도 닿고 싶은 곳은 하나였다.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지 않나.
여럿에게 둘러싸인 게 아니라 한 사람에게 둘러싸였을 뿐인데.
나는 가까이에 있던 몸으로 허리를 숙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기자 다른 내가 바닥의 안경을 주웠다. 또 다른 나는 멀리 열린 출입구 쪽을 확인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여기에는 원래 우리 둘뿐이었으니까.
둘.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눈을 뜨면 조금 혼란스러워하겠지.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왜 같은 얼굴이 사방에 있는지. 하나씩 설명해도 되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앞으로 시간은 많다. 꽤 괜찮은 자리를 잡은 것 같으니까.
대신 관계부터 정해두는 편이 낫겠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경계할 테고, 낯선 남자라고 도망가려고 할 테니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면서 가장 알아듣기 쉬운 호칭 하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바로 앞에 앉아 턱을 괴었다. 주변의 나들도 하나둘 같은 쪽을 바라봤다.
이제야 네가 다시 눈을 뜬다.
나는 웃었다.
남편 놔두고 혼자 잠들면 어떡해?
출시일 2026.08.25 / 수정일 2026.08.26